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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1800년대 '덕률풍'부터 삐삐·전화번호부까지 통신 역사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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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 행구동 위치한 KT 통신사료관에서 이인학 정보통신역사연구소장이 해설하고 있는 모습. [사진 제공 =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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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가 16일 미디어데이를 개최하고 강원도 원주연수원에 마련한 통신사료관을 처음으로 대외적으로 공개했다. 전체 2층 465평방미터 규모의 전시관에는 19세기 말 전화기부터 스마트폰을 아우르는 6000여점의 통신사료가 전시돼있다. 특히 벽괘형 공전식 전화기, 최초의 다이얼식 전화기, 인쇄전신기를 비롯해 문화재로 등록된 사료들도 포함돼있다.

통신사료관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시대별 전화기다. 가장 오래된 사료는 1800년대 말 황제가 사용하던 전화기 '덕률풍'이다. 덕률풍은 '텔레폰'의 영어발음을 한자식으로 그대로 옮긴 명칭이다. 황제의 전화가 걸려오는 시간에 맞춰 신하가 의관을 정제하고 네번의 큰 절을 올린뒤 전화기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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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휴대용 자석식 전화기(1900년대), 등록문화재 제 430호 벽괘형 공전식 전화기(1955), 등록문화재 제 431호 국내최초 다이얼식 전화기(1935). [사진 제공 =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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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는 교환기의 발달에 맞춰 진화해왔다. 초기 전화기는 송수신기가 분리된 형태로 송신기에 붙은 핸들을 돌려 신호를 교환기에 보냈다. 이후 송수신기 일체형 전화기가 세상에 나온다. 자석식 전화기와 공전식 전화기는 교환기에 신호 램프가 들어와 교환원이 통화 연결을 하는 방식이었다. 다이얼식 전화기는 다이얼을 돌려 자동으로 교환기(기계식)를 동작시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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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통신사료관에 전시된 교환기 TDX-1. [우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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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통신 역사에서 의미있는 교환 설비는 바로 'TDX-1'이었다. 1984년 전자교환기 TDX-1을 자체개발한 이후 2년 뒤 상용 개통했는데 이는 세계에서 10번째였다. KT 관계자는 "TDX 교환기 개발이 외국에 의존하던 교환설비를 국내 독자 기술로 설계 제작 구축함으로써 당시 만성적인 전화적체를 해소하고 전국 전화보급의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사료관에는 시대별 공중전화도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공중전화가 처음 설치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이었다. 당시 이용요금은 50전으로 쌀 다섯가마니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값비쌌다. 1962년 광복 이후 옥외 무인공중전화기가 처음 설치됐으며, 시내외 겸용 공중전화기는 1977년이 돼서야 서비스를 개시했다. 당시 부스마다 시외전화를 걸기 위해 줄을 선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82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첫 시내외 겸용 DDD 공중전화가 나오며 공중전화도 보편화됐다. 공중전화 초기에는 동전주입식이 도입됐지만, 거스름돈이 반환되지 않는 데 불만이 높았다. 이에 쓰는 만큼 차감되는 공중전화 카드가 등장했다. 공중전화 카드는 올림픽, 엑스포와 같은 주요 이벤트나 문화재로 꾸며지며 시대를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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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통신사료관에 전시된 전화번호부. [우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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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료관에는 시대별 전화번호부도 보관돼있다. 1996년부터 가입자수가 많아지며 전화번호부가 발행됐다. 당시 유선전화 가입자들이 쉽게 번호를 찾을 수 있도록 KT는 1년에 1부씩 무료로 전화번호부를 배포했다. 두꺼운 전화번호부가 가정이나 공중전화 앞에 비치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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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헌트'에 동원된 인쇄전신기. [사진 제공 =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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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된 영화 '헌트' 촬영에 동원된 인쇄전신기도 눈길을 끌었다. 전신기는 지금의 우체국에 설치돼 전보를 주고받기 위해 사용됐다. 인쇄전신기는 타자기를 치며 종이에 글자를 인쇄할 수 있어 당시 서면통신의 속도를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후 텔렉스를 이용하며 내용을 저장한 뒤 송수신할 수 있게 됐다. 텔렉스는 근현대 한국 수출업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팩스와 PC통신으로 인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동통신의 변천사도 확인할 수 있었다. 1982년 235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0년만에 145만2000명을 돌파한 이후 1997년 1519만4821명까지 늘어났다. 인구 세 명당 한명은 삐삐를 착용한 셈이다. 삐삐의 대중화는 공중전화의 보급도 앞당겨 1997년 42만3502대까지 설치됐다.

본격적인 이동전화의 시작은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 기술이 상용화되면서다. CDMA는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 방식을 채택한 2세대(2G) 이동통신 기술이다. 음성뿐 아니라 문자라는 디지털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었다. PCS 상용 서비스가 개시되고 이동통신은 빠르게 확산됐으며 1999년 이동전화 가입자수가 유선전화를 앞질렀다.

이날 KT 통신사료관의 해설을 맡은 이인학 정보통신연구소장은 "KT가 원주에 보관하고 있는 통신사료들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흐름에 따른 시대상과 국민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아주 높다"고 짚었다.

[우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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