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이슈 애니메이션 월드

배우 강수연 영화인들 배웅 받으며 영면(종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영결식 눈물바다, 영화계 선후배들 상실 끌어안으며 애도

김동호 "천상의 별 되어 우리 영화 지켜달라"

연상호 "한국영화 같았던 분...연기는 현재 진행형"

아시아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의 별' 배우 강수연이 11일 영화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면에 들었다. 고 강수연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10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엄수했다. 고인은 지난 5일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치료를 받다가 7일 별세했다. 향년 55세.

생전 고인과 영화 현장을 함께 한 동료들은 상실을 끌어안으며 애도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함께 이끌었던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은 추모사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당신을 떠나보낸다"며 울먹였다. 그는 "우리가 자주 다니던 옥혜경 만두집에서 만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떠나다니…. 아버지와 딸, 오빠와 동생처럼 지내왔는데 어떻게 나보다 먼저 떠날 수 있느냐"고 비통해했다.

김 이사장은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는 지난 발자취를 찬찬히 떠올렸다. 그는 "젊은 나이에 '월드 스타'라는 왕관을 쓰고 힘들게 살아왔다.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며 끝까지 잘 살아왔다"고 고인을 위로했다. 이어 "억세고도 지혜롭고 강한 가장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내색하지 않고 부모님과 큰 오빠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동생들도 잘 이끌었다"며 "그런 리더십과 포용력으로 후배들도 잘 이끌었다"고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지상이 아닌 천상의 별이 되어 우리 영화를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아시아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씨받이(1987)',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등으로 고인을 세계적 스타로 인도한 임권택 감독도 슬픔을 억누르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처럼, 딸처럼, 동생처럼 늘 곁에 있어 든든했는데, 뭐가 그리 바빠서 서둘러 가느냐"며 울먹이고는 "편히 쉬어라"라고 말했다.

박종원 감독의 영화 '송어(1999)'에서 고인과 함께 연기한 배우 설경구는 추모사에서 "원통하고 비통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상황이 너무 잔인하다"며 슬퍼했다. 그는 고인을 가리키며 "영화 경험이 없던 제게 세세하게 가르침을 주신 선배"라고 했다.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막내까지 챙기시며 무한한 용기와 사랑을 주셨다"며 "선후배를 모두 아우르는 거인 같은 사람이었다. 너무 당당해서 외로우셨을 선배가 너무 보고 싶다"고 밝혔다.

고인의 마지막 작품 '정이'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11년 전 추억을 회상했다. 그는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작은 작품(돼지의 왕)으로 몇 개의 상을 받았는데 칸국제영화제 관계자가 찾아와 건네는 말을 일일이 통역해주셨다"고 했다. ‘돼지의 왕’은 이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연 감독은 "칸영화제 초대보다 어째서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스타가 영어를 몰라 쩔쩔매는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을 도와주셨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마치 자신이 한국영화인 것처럼 무거운 멍에를 두려워하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런 분과 작품을 함께 하게 돼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어 "다시 후반작업실로 들어가 선배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면서 "강수연의 연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제가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1980~1990년대 한국영화계를 풍미한 배우다. 네 살 때 아역으로 데뷔해 50여 년 동안 영화 약 쉰 편에 출연했다. 20대 초반부터 강한 집념으로 연기를 갈고닦아 독창적인 표현 세계를 구축했다. 열연은 한국영화의 국제적 도약과 직결됐다. 그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서 비극적 운명을 살아가는 대리모를 연기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모순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 얻은 결과였다. 한국 배우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칸·베네치아·베를린) 트로피를 품어 '월드 스타'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 시기에 고인은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였다. 영화 서너 편을 동시에 촬영할 정도였다. 특히 1987년에는 개봉한 작품만 여섯 편에 달했다. '연산군', '감자',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됴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등이다. 그는 각기 다른 매력으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뽐냈다. 이후에도 과감한 도전으로 전형성을 탈피해 다양한 업적을 이뤘다. 대표적 성과로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받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이 꼽힌다. 머리를 삭발하고 세속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대승적 수행을 그려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아시아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코리안 뉴시네마'의 한 축을 담당했다. 박광수, 장선우, 이현승 등 연출자들과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등을 합작했다. 1991년에는 대만 영화 '낙산풍'에도 출연했다. 한국 배우의 해외 진출이 거의 없던 시절에 감행한 놀라운 도전이었다. 고인은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들의 선구자로 거론되기도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에 출연하며 사회·문화적 흐름을 이끌었다. 일찍이 해외 영화제를 오간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 행정 업무도 도맡았다. 특히 2015~2017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올해는 지난 1월까지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를 촬영했다.

고인의 유해는 이날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돼 용인공원에 안치된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