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에너지 공급망 지각변동
美·英 이어 ‘금수 지지’ 여론 커져
카타르 등 중동에 공급 확대 요청
남미·아프리카 에너지도 재조명
가스·석유발전은 원자력으로 대체
英 “원전 비율 25%까지 늘릴 것”
러는 中에 수출 물량 늘리기로
지난 15일(현지 시각) 독일 동부 슈베트에서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 소속 활동가들이 PCK 정유공장으로 통하는 철로를 막은 채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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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전 세계 에너지 공급망에 초대형 지각 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유럽연합(EU)도 러시아산 천연가스와 원유 수입을 중단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중동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지고 남미와 아프리카 등 이른바 제삼세계의 에너지 공급량이 늘어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냉전 이후 러시아의 진입으로 지각 변동을 일으켰던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신냉전 도래와 함께 다시 과거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제기된다.
21일(현지 시각)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112.12달러에 거래를 마치며 110달러대를 다시 돌파했다. 지난주 금요일보다 7.42달러(7.1%) 오른 것이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EU마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금지하면서 기존 에너지 공급망이 크게 바뀔 수 있다는 소식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유럽이 전 세계 원유 소비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8%에 이른다.
EU는 당초 러시아 원유 금수에 부정적이었다. EU의 전체 원유 수입에서 러시아산(産)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8%다. 이를 짧은 시간 내에 대체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무자비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공격이 유럽 전체에 분노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브뤼셀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담에서 러시아산 원유 금수에 대한 지지세가 크게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폴란드와 일부 발트해 국가에 이어, 스웨덴⋅아일랜드⋅슬로베니아⋅체코⋅덴마크 등이 러시아 원유 금수 조치에 ‘검토 가능’으로 돌아섰다. WSJ는 “특히 유럽 최대 러시아 에너지 소비국인 독일마저 미묘한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여전히 반대 입장이 명확한 나라는 헝가리 정도다.
지역별 연간 원유·천연가스 에너지 생산량 |
EU의 태도 변화는 러시아산 에너지 대체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미국과 영국, EU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산유국을 잇따라 접촉해 원유·천연가스 증산과 기존 생산량의 유럽 공급을 요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독일 정부와 카타르가 ‘장기 에너지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블룸버그통신 등은 “중동 산유국 대부분이 급격한 공급량 변화에 난색을 보이고 있지만, 점진적으로 러시아산 에너지를 대체해 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원자력 에너지도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천연가스와 석유 발전을 원자력 발전으로 대체하면 러시아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벨기에가 17일 기존 원전 폐쇄 계획을 취소하고 기존 원전의 수명을 늘리기로 했고, 영국도 21일 현재 15%대인 영국 전체 발전 용량 중 원전 비율을 25%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EU 각국에서 반(反)러 여론이 확산하면서, EU 회원국 정치권에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라”는 압박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배경이다.
중동산 에너지 공급 확대와 함께, 아프리카와 남미산 에너지도 재조명되고 있다. 이 지역의 원유·천연가스 수입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이 되고, 유전 개발을 촉진해 탄소 저감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도외시되어 왔다. 하지만 미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최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산 원유·가스 수입 문의가 줄을 잇고 있다. 이 신문은 “(세계 7위 원유 수출국인)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앙골라와 남수단, 가봉 등이 주목받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은 남미 최대 산유국 베네수엘라에 눈을 돌리고 있다. 반미·반서방 성향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지난 2019년 부정선거로 재집권하면서 베네수엘라는 서방에 대한 원유 수출이 금지돼왔다. 금수 조치 전 베네수엘라의 하루 평균 원유 수출량은 125만배럴로, 세계 10대 산유국인 카자흐스탄(141만 배럴)과 맞먹고 러시아의 원유 수출량(465만배럴)의 27%에 달했다. 바이든 미 행정부는 당분간 베네수엘라로부터 필요한 석유 물량을 도입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는 중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21일 “시베리아에서 카자흐스탄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는 원유 물량을 확대하는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이 운송로(파이프라인)를 통해 중국에 수출되는 원유는 연간 1000만t에 달한다. 서방에 대한 협박도 이어지고 있다.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 담당 부총리는 “서방에 러시아 원유 공급이 중단되면 국제 유가는 배럴당 300~500달러까지 치솟으며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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