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국제유가가 또다시 상승하며 가뜩이나 불안한 경제 전망에 먹구름이 짙어지고 있다.
지정학적 갈등이 지속되면서 국제유가 상승이 이어질 수 있고 원화값 급락과 맞물려 우리 경제에 이중고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 때문에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 슬로플레이션(고물가 속 저성장) 등에 대한 경고 전망들이 쏟아지고 있다.
8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한때 배럴당 129.44달러까지 올랐다가 결국 123.7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전날 대비 4.3달러(3.6%) 오른 것으로, 종가 기준 2008년 8월 이후 최고치다. 국제유가 상승 효과는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국내 기름값으로 전가된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사이트 오피넷에 따르면 9일 오전 기준 전국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은 전날보다 19.5원 오른 ℓ당 1880.1원으로 집계됐다. 2014년 3월 이후 8년 만에 최고가다. 국내 휘발유 가격은 통상 2∼3주 시차를 두고 선행지표인 국제유가 추이를 따라가는데, 최근 국제유가 상승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국내 휘발유가격도 당분간 계속 오를 전망이다.
우리나라 정유사들은 유가가 오르면 단기적으로는 재고 이익 상승효과를 누릴 수 있지만, 향후 정제마진이 낮아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정제마진은 최종 석유제품가격에서 원유가격과 수송·운영비 등을 뺀 금액이다. 석유제품 수요가 줄어드는 경우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가격이 낮게 형성돼 수익성이 악화된다.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 비중이 높은 석유화학업체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프타는 에틸렌·프로필렌 등 석유화학업체들이 생산하는 주요 제품의 원료다. 원유에서 나프타를 뽑아내다 보니 유가 상승은 나프타 가격 상승으로 직결된다. 또 항공사와 해운사의 경우 영업비용 중 상당 부분을 연료비가 차지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실적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유가가 급등해 기업 이익이 줄어들면 시차를 두고 항공이나 해운 운임이 상승하면서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될 수밖에 없다. 항공·해운기업이 유가 급등에 따른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결국은 운임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국제유가가 올해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과거 오일쇼크를 넘는 수준의 영향을 경고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 경제 전체의 악영향도 불가피한 데다 원화값 하락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지면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어서다.
이미 비상등은 곳곳에서 켜지고 있다. 2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7% 상승했다. 이달에 만약 4%를 넘어설 경우 이는 2011년 12월(4.2%) 이후 처음이다. 여기에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항공·해상 물류에 비상이 걸리면서 수출 역시 낙관하기 어렵다. 지난달 무역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긴 했지만 다시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염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높아지는 물가와 무역수지 악화가 현실화될 경우 올 3% 성장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미 민간기관에선 2%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올 들어 국제통화기금(IMF)과 신용평가기관 무디스 등이 각각 기존 3.3%와 3.2%였던 올 성장률 전망치를 3.0%로 하향 조정했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지난 7일 내놓은 '3월 경제동향'에서 "완만한 경기회복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대외 여건에 대한 우려로 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경기가 꺾였다는 신호도 등장하고 있다. 통상 6개월 이상 하락하면 경기전환 신호로 여겨지는 경기선행지수 순환변동치는 1월 100.1을 기록했다. 작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하락으로 이 지수가 떨어진다는 것은 경기에 대한 불안한 전망이 많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대러시아 제재로 인해 한국 기업의 수출경기가 둔화되고 원자재 수입도 증가하면서 경상수지가 악화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또한 국내 물가가 상승 압력을 강하게 받아 소비·투자심리를 위축시켜 내수시장 침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며 저성장과 고물가가 동시에 나타나는 슬로플레이션 진입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이유섭 기자 / 박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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