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한민국 지속 가능 솔루션'은 대선을 맞아 한국일보가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나라 당면 현안에 대한 미래 지향적 정책 대안을 모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정치 외교 경제 노동 기후위기 5개 분과별로 토론이 진행되며, 회의 결과는 매주 목요일 연재됩니다.한국일보 대선 기획인 '지속가능 대한민국 솔루션' 정치분과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이 바람직한 의회정치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회의 참석자들은 여야가 대통령만 바라볼 게 아니라 국회 안에서 정책을 두고 협의와 경쟁의 정치를 벌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왼쪽부터 장승진 국민대, 이재묵 한국외대, 조진만 덕성여대, 박경미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배우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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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병폐로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를 지적하지만, 정치 양극화 또한 적대와 분열의 정치를 부추기는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정치 양극화 주범으로는 진영 논리에 빠진 양대 정당이 지목되고 있다. 정책과 이슈를 막론하고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사회통합은커녕 국회를 기능부전에 빠뜨리고 말았다. 거대 양당 중심으로 동물국회와 식물국회를 오락가락하는 사이 국회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대의민주주의는 질식상태에 빠졌다.
한국일보 대선기획 ‘대한민국 지속가능 솔루션’ 정치분과 최종(4회)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타협과 경쟁의 의회정치 제도 및 문화를 정착시키지 않으면 정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분과위원장을 맡은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한국정당학회장)는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협치가 기본이지만 이념 대립이 확실한 이슈를 두고는 치열한 경쟁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경미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의민주주의 정립을 위해서는 국회와 대통령의 대등한 파트너십 구축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또 의회정치 복원을 위해 상향식 공천제도 도입, 법사위 폐지, 인사청문회 개선 등을 제안했다.
지난달 27일 한국일보에서 진행된 회의에는 정치분과위원장인 조진만 교수와 박경미 교수, 이재묵 한국외대ㆍ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정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참석했다.
국회 선진화법 중간점검 필요한 시점
조진만 교수=어느 나라든 국회 신뢰도가 낮지만 우리나라는 그중에서도 특히 낮은 축에 속한다. 국민 대의기관으로서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문제는 사실 광범위한 주제다.
조진만 덕성여대 사회과학부 교수. 인하대 정외과·연세대 정치학 박사. 전 한국정당학회장. 배우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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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미 교수=국회불신 해소를 위해 도입한 패스트트랙 제도가 문제를 해결했는지 의문이다. 법안이 오래 계류되는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로 넘어가도록 한 제도인데, 대체로 정당 간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리는 법안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하다 보니 토론과 심의를 잘 진행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정해져 있는 심의기간은 퇴장하지 않고 논의에 참여해서 논쟁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장승진 교수=국회 의사결정 구조 자체가 국회를 더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협치는 좋지만 협치가 이뤄지지 않을 땐 문 걸어 잠그고 싸우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지난 총선 후 민주당이 모든 상임위원장을 가져갔을 때 개인적으로는 한국 국회에 새로운 문화가 나타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당이 책임지고 정책을 결정하는 다른 방식의 국회 운영을 목격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1년 후 상임위를 다시 분배한 점은 아쉽다.
장승진 국민대 정외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미 컬럼비아대 정치학 박사. 한국정당학회 기획위원장. 배우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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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묵 교수=국회선진화법 등 제도적으로는 충분한데 잘 돌아가지 않는 건 본질적으로 정당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정당 간 합의와 타협의 여지가 줄며 공존의 공간이 사라지다 보니 비쟁점 법안에만 치중하고 있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이 다를 때 머리를 맞대고 풀어낼 교집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정당의 벽에 가로막혀 쟁점은 회피하고 비쟁점 위주로 국회가 돌아가다 보니 교착상태가 길어지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의원들의 자율성을 올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조진만 교수=예전엔 초선과 소장파 의원들이 여야를 초월한 개혁의지가 있었는데 요즘은 의원들의 자율성과 파트너십이 많이 떨어졌다. 여야 정치개혁이나 선거제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갈등이 생기면 다선의원들이 막후조정도 했는데 피아 구분이 확실해지면서 서로 인사도 잘 안 한다.
장승진 교수=여야를 넘어 타협하는 정치를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정당이 의원에게 가하는 통제력이 약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공천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다만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현실적합성을 더 따져봐야 한다. 무엇보다 법사위의 체계ㆍ자구심사는 없어져야 한다. 예전에 국회의원들의 입법능력이 떨어질 때나 의미 있었지 21세기에는 필요 없다. 법무부나 법제처, 또는 소관 상임위로 체계ㆍ자구심사 기능을 넘기면 법사위 자체도 필요 없다.
이재묵 교수=국회 원구성 때 국회의장을 여당이 가져가고 법사위원장을 야당이 가져가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던 관례가 문제다. 미국처럼 다수당을 차지하면 상임위를 모두 가져가고 입법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방식으로 가는 게 맞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외과 교수. 연세대 정외과·미 아이오와대 정치학 박사.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 배우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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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교수= 20대 국회 원구성을 할 때 민주당이 야당에 법사위를 못 준다 해서 논란이 불거졌는데, 당시 여당은 ‘야당이 체계·자구심사로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이유로 법사위를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법사위원장은 여당인 민주당이 가져가고 체계·자구심사 조항은 없애야 했는데, 결국 그대로 남겼다. 일단 위원장을 확보하고 난 뒤에는 체계·자구심사 조항마저 놓기 싫었던 것이다. 법사위의 과도한 권한은 분명히 조정이 필요하다.
박경미 교수=국회선진화법으로 국회의장 권한을 약화시키고 필리버스터를 도입하면서 과거 몸싸움 형태로 진행됐던 여러 문제를 없앴다. 하지만 국회의장 직권상정이 불가능해지면서 처리가 지연되는 법안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박경미 전북대 정외과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이화여대 정치학 박사. 전 한국정당학회 부회장. 배우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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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교수=직권상정제도가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협치가 안 됐을 때 성과물을 낼 수 있는 일종의 대안 기능을 한 것도 사실이다. 미국도 상임위가 깔아뭉개는 법안을 전체 의원 5분의 3이 동의하면 강제로 본회의에 올리는 ‘심사배제(discharge)’제도가 있다.
이재묵 교수=동물국회를 지양하려고 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결국은 더 나쁜 식물국회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 선진화법에 대한 중간평가를 할 때다.
너무 강한 대통령...국회 견제기능 커져야
장승진 교수=대통령제하에서 국회 힘이 약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재난지원금 문제다. 180석 여당이 경제부총리 한 명을 이기지 못해 좌절하는 모습이 세 번쯤 반복됐다. 박근혜 대통령 때는 청와대가 행정입법을 밀어붙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국회의 권한 자체가 취약한데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권 내지 정치를 주도할 권한이 강화돼야 한다.
이재묵 교수=국민이 두 번의 선거를 통해 입법부와 대통령에게 주권을 위임하는 것은 수평적으로 견제와 균형을 하라는 주문인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그런 자각을 못하는 것 같다. 대통령과 같은 당이냐 아니냐만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여야가 국회에서 만나 정책 협의는 안하고, 여당은 청와대와 당정협의회를 하고 야당은 여당과 협의가 안 된다며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대통령이 의회정치의 중심인 셈이다.
장승진 교수=국회 스스로 권한을 늘릴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상시 국정감사도 법만 개정하면 된다.
조진만 교수=미국은 헌법 1조에 ‘미 연방의 입법권은 의회에 있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대통령은 연방의 상징적 지도자일 뿐이고 주권자의 위임을 받아 입법을 하는 가장 중요한 권력기관이 국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우리는 대통령을 최고 권력기관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인식을 깨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재묵 교수=대통령이라는 말 자체를 바꿔야 한다. 굉장히 권위적인 말이다. 대통령(president)의 영어식 표현에서 preside는 ‘주석’이라는 해석이 맞다. 그러나 주석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면서 대안으로 대통령을 사용하게 됐는데 단어를 왕처럼 만들어놨다. 대통령의 이름은 너무 강한 반면 의원은 아주 평범한 말이다.
박경미 교수=국회가 대통령과 파트너십을 형성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게 핵심이라고 본다.
이재묵 교수=인사청문회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국정감사나 국정조사가 당연히 국회가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대통령의 인사는 행정부 고유권한일 수 있다. 그런데 점점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해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청문회가 정책 역량보다는 도덕성 검증에 치중하면서 국가적 자원낭비라는 느낌이다. 청문회가 정책 역량보다는 도덕성 검증으로 흘러서 사회적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장승진 교수=인사청문회에 국민의 알권리 충족, 국회의 견제권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지금 형태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 기능이 더 크다. 기어이 상대에게 흠집을 내고 말겠다는 선거의 네거티브와 같은 것인데, 찾다찾다 못 찾으면 코드인사라고 비판한다.
장승진 교수=다른 접근을 한다면 기간을 늘리면 좋겠다. 3일에 불과한 청문회 일정은 도덕성 검증만 하다가 끝나고 만다. 기간이 길어지면 일주일은 도덕성 문제를 다루고 그다음 일주일은 정책을 검증할 수도 있다. 또 보고서를 채택하지 않는 걸로 끝내지 말고 국회 표결을 부치면 구속력이 없다 해도 국회구성원 다수가 반대하면 대통령 마음대로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잠시 버티는 기간으로 둘 것이 아니라 인사청문회 법안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조진만 교수=의원내각제처럼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같이 와서 연설만 하고 갈 게 아니라 대정부질문을 받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현안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국무회의에서 연설만 할 게 아니라 국회에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으면 즉각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세대교체가 진정 정치개혁인가
이재묵 교수=국회에서 세대교체론이 불거졌는데 뭔가 간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86세대 나간다고 97세대가 충분히 개혁적인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또 3040세대를 장관에 임명하면 젊은층이 만족할까. 정치인을 세대로 구별하는 건 문제가 있다. 도리어 역량 있는 자원을 공정하게 선발하느냐의 문제다. 선거를 앞두고 정당에서 우후죽순으로 인사를 영입하는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마치 세대교체를 하는 것처럼 젊은층을 구색 맞추기 용도로 사용한 뒤에는 용도폐기해 버린다. 그런 식으로 소비된 인재들이 이미 많이 증발했다.
조진만 교수=영입을 통한 정치인 공급은 루트가 잘못 됐다. 피선거권 연령도 낮아진 만큼 기초의원부터 경력을 닦은 정치인을 국회 무대로 진출시키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박경미 교수=정당법 개정을 통해 입당 연령을 낮췄는데 개편된 현재 교육과정을 보면 정치인식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은 크게 축소되고 있다. 고교생이 정치활동을 하려면 중학교나 그 이전부터 정당활동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 있어야 하는데 초ㆍ중등학교에 그런 교육이 거의 없는 상태다.
장승진 교수=한국에서는 정치를 죄악시하고 정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릴 때부터 정치와 친숙하게 접하고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정치와 거리를 둬야 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오히려 정치 무관심을 체계적으로 배양시키고 있다.
김정곤 논설위원 jkkim@hankookilbo.com
송은미 기자 mys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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