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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주한미군 철군 계획’에 항명, 유엔사 참모장 해임된 싱글러브 前 소장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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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몇 개와 한국인 수백만 명 목숨 바꾼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 있을까”

1977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했다가, 당시 유엔사 참모장 직책에서 해임됐던 존 K 싱글러브(Singlaub‧싱로브) 전(前) 미 육군 소장(100)이 1월 29일 미국 테네시주 프랭클린의 자택에서 숨졌다.

1977년 카터 대통령은 당시 3만2000명에 달하는 주한 미군(지상군)을 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그해 5월 싱글러브 당시 소장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미 지상군을 계획대로 철군하면, 1950년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신문에 자신과 다른 고위 군장성들은 카터 계획이 현명한지 의문을 갖고 있으며, 전투 준비를 갖춘 제2 미 보병 사단을 계획대로 철군하면 남한의 방위력은 심각하게 약화돼, 김일성의 남침을 부추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1만4000명의 미2사단 병력은 한국군 전체보다도 많은 공격 헬기와 대(對)전차미사일(TOW)를 보유했다. 탱크 2000대의 북한군을 압도할 화력과 지상 감시 레이더‧기동성을 갖추고, 북한군의 서울 공격 주요 루트를 방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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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5월 미 하원 군사소위원회에 출석해, 탱크 2000대 등 북한군의 최신 동향을 공개하는 싱글러브 육군 소장./미 하원 군사소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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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러브는 이 신문에 “미국이 중국과 베트남에게 고전한 뒤, 상황을 잘 아는 우리 군인들이 정책결정가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의견을 분명히 표명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그걸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2개월간의 집중적인 정보수집으로 북한군이 우리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정책결정가들이 2,3년 된 정보에 의존해 결정하지 않나 우려한다”고 말했다.

싱글러브는 나중에, “북한군은 1970년대 전반에 대포와 전투기는 두 배, 장갑차는 세 배, 수륙양용차와 수송기는 네 배로 늘렸으며 휴전선 인근에 공군 기지를 만들고 병력을 공격대형으로 전진 배치했는데, 미국은 1976년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싱글러브의 이 인터뷰는 당시 필립 하비브 국무부 정무차관과 조지 브라운 미 합참의장이 5월24일 카터의 특사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기 직전에 이뤄졌다.

사실 그의 ‘철군 반대’ 의견은 존 베시 당시 주한 미군사령관을 비롯한 고위 미군 장성들이 공유하고 있었다. 또 싱글러브는 당시 인터뷰 말미에서 “(철군) 결정이 내려지면, 열정과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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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러브 소장이 주한미군 철군 반대 발언으로, 카터 대통령에 의해 소환된 사실을 보도한 1977년 5월21일자 조선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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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군 통수권자인 카터에게 일개 육군 소장 싱글러브의 인터뷰 내용은 항명(抗命)이었고, 카터는 격노했다. 싱글러브가 1992년에 낸 회고록 ‘위험한 임무(Hazardous Duty)에 따르면, 카터는 싱글러브를 백악관으로 불러 1시간 반 동안 “군의 문민 통제”를 설교하고, 자신도 해군 대위 출신으로 “어려운 결정들을 내린 경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싱글러브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해군 복무가 8년도 안 되고 그나마 핵물리학자로 근무했다면서, 위관급이 무슨 엄청난 결정을 한다고’라고 생각했다. 싱글러브는 나중에 “군의 문민통제 같은 건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고 말했다. 카터는 나중에 기자들에게 “(이번 사건으로)정책이 결정되고 나면 군 장교들이 지켜야 할 예의가 크게 훼손됐다”고 말했다.

싱글러브는 이 사건으로, 미 조지아주 포트 맥퍼슨의 육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보직이 변경됐고, 카터와 존 브라운 국방장관은 싱글러브가 육군사령부로 가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 짐을 싸는 것도 반대했다. 결국 환송 파티나 훈장 수여, 기자 인터뷰, 이임 전 박정희 대통령 예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으로 잠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박 대통령은 나중에 사람을 보내, 위로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싱글러브는 이후에도 계속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과 중성자탄 제조 연기, B-1 폭격기 생산계획 취소 등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35년간의 군 복무를 끝으로 1978년 4월 전역해야 했다.

그의 유엔사 참모장 해임은 미국에서도 6‧25 전쟁의 와중에, 중국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와 대만의 국민당 병력 동원 등을 건의하며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라디오 뉴스로 해임 통보를 받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연상케 했다. 실제로 맥아더 해임 이후 미 대통령이 해임한 첫 사례가 됐다.

싱글러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육군 소위 시절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특수부대원으로 낙하해 레지스탕스와 함께 활동했고,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 요원으로 활동했다. 6‧25 전쟁 때에는 대대장으로 김화 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싱글러브는 전역 후에도 공산주의 정권과 싸우는 니카라과 반군(Contras)를 지원하는 등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워싱턴포스트는 1일 그의 사망을 알리며 “공산주의에 맞서 사적인 전쟁을 벌였던 담대한 전사”라고 표현했다. 그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막아 한미 동맹을 강화한 공로로, 2016년 ‘백선엽 한미동맹상’을 받았다.

싱글러브는 훗날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내 별 몇 개를 (한국인) 수백만 명의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 이상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는가.”

[이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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