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5 (월)

이슈 인공위성과 우주탐사

1960년의 한국 첫 인공위성…주인공은 어디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박상준의 과거창]

경기공고 과학반이 만든 ‘유생물 인공위성’

1959년 세계 미사일발사장 지도 속의 인천

잊혀진 한국 초창기 우주개발사 복원할 때


한겨레

1959년 '우주과학' 회지에 실린 세계 로켓발사장 지도. 서울SF아카이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우주개발의 역사를 논할 때 2021년은 여러모로 변곡점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자체 개발한 75톤급 로켓 엔진을 달고 우주공간에 오른 누리호의 발사를 맨 먼저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정책적인 면에서 보면 지난 40년 넘게 우리나라 로켓 발사체의 개발을 제한해 왔던 한미미사일(사거리)지침이 완전 철폐된 것이 더 의미심장한 일이다. 2021년 5월에 미국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이 지침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이로써 우리나라는 아무런 제약 없이 얼마든지 고성능 로켓을 연구하고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우주 로켓을 안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못 만든 것이다.

한겨레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만약 한미미사일지침이 없었다면 우리 손으로 만든 로켓이 우주로 날아오르는 일은 몇십 년 앞당겨져 이미 20세기 중에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히 희망적인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나라의 초창기 우주개발 역량이 그 정도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로켓 발사 공개 실험은 1959년 인천 해안에서 실행되었으며, 당시 국방부과학연구소(현재의 국방과학연구소와는 다른 기관)에서 만든 3단계 로켓을 포함해 총 5개의 로켓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참관했던 이 발사 실험은 대한뉴스 영상으로도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국가기록원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당시의 실험은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은 차원의 일이었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우주공학 전문 잡지 ‘미사일과 로켓(missiles and rockets)’ 1959년 3월호에는 세계 미사일 발사장 지도가 실려있는데, 여기엔 한반도의 ‘Inchon(인천)’도 표시되어 있다. 더구나 이 잡지는 위에 언급한 공개 실험보다도 몇 달 먼저 나온 것이다. 이는 앞서 1958년에 이미 비공개로 같은 장소에서 로켓 실험을 했던 것이 알려진 때문이었다.

이 지도는 1959년 10월에 창간된 ‘우주과학’이라는 간행물에 재수록되어 우리 국민에게도 알려졌다. ‘우주과학’은 앞서 1958년에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개발 관련 전문가 조직인 대한우주항행협회의 기관지이다. 당시의 회원들은 여러 대학의 우주항공공학자들 및 공군, 또 정부의 관련 부처 직원 등 우주개발 분야의 엘리트들이 총망라되었다. 그중에는 훗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우주왕복선 개발의 주역 중 하나로 활약하게 되는 박철 박사 같은 인물도 있었다.

한겨레

1960년 전국과학전람회에 출품된 '유생물 인공위성'. 서울SF아카이브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초창기 우주개발사가 잊혀진 이유


로켓보다 더 알려지지 않은 분야는 인공위성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은 공식적으로 1992년에 지구 공전 궤도에 오른 우리별 1호가 맞지만, 인공위성 제작 시도 자체는 그보다 30년도 더 전인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전국과학전람회에서는 경기공업고등학교 과학반이 장승호 교사의 지도로 ‘유생물 인공위성’을 만들어 출품, 민의원의장상을 수상했다. 이것은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로켓에 실려 우주 궤도에 오르면 인공위성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각종 측정장치와 통신장치 등이 들어 있었다. 인공위성 제작에서 중요한 관건 중 하나가 우주 환경에서도 잘 동작하도록 탑재 장비들을 설계하는 것이다. 우주는 진공 상태에다 강력한 우주방사선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극저온과 태양열로 인한 고온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당시 출품자들은 그런 점들까지 고려하여 실제로 우주에서 작동할 수 있는 인공위성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인공위성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제작된 인공위성도 아직도 어딘가에 흔적이나마 남아있기는 한 건지 전혀 알 수 없을뿐더러, 당시의 경기공업고등학교(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 장승호 교사와 과학반 학생들도 찾을 수 없다. 사실 필자는 십수 년 전부터 이 인공위성과 관련된 내용을 기고와 강연 등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알리면서 제보를 기다렸지만 아직 단 한 건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 우주개발사를 논할 때 다들 기억하는 것은 최초의 인공위성이 1992년의 우리별 1호라는 사실이고 로켓 역시 2013년에야 발사에 성공한 나로호를 떠올릴 뿐이다. 1950년대 말의 로켓 발사와 대한우주항행협회의 결성, 1960년대 초의 인공위성 제작 시도와 60~70년대에 활발했던 민간의 로켓 동아리 활동 등은 사실상 잊힌 채 이제껏 누구도 제대로 복원하고 알리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왜 우리의 우주개발 역사는 이렇듯 단절되었던 것일까? 사실 이는 정치 및 외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각각 집권 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로켓 연구팀을 해체하거나 각서(한미미사일지침)를 쓰는 등 적극적으로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로켓 개발이 대륙간 탄도탄 등 미사일 무기로 전용될 것을 우려하던 미국을 의식한 일이었다.

이렇듯 우리의 우주개발 의지를 옥죄어오던 한미미사일지침이 완전히 폐지된 지금이야말로 비로소 우리의 잊힌 초창기 우주개발 역사를 완전히 복원할 때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노령으로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이제라도 남은 분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모아서 기록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관계기관들에 관심과 지원을 간곡히 호소드린다.

박상준(서울SF아카이브 대표)

벗 덕분에 쓴 기사입니다. 후원회원 ‘벗’ 되기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주식 후원’으로 벗이 되어주세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