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5대 대선 TV토론 당시 쓰리 버튼 정장에 화려한 넥타이와 행커치프를 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중앙포토] |
지금 봐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넥타이는 화려했다. 72세 나이가 무색할 만큼 세련된 쓰리 버튼 정장을 입고, 왼쪽 가슴엔 행커치프로 포인트도 줬다. 여기에 이빨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짓는 웃음까지. 모두 대선 TV토론을 겨냥한 DJ의 ‘알부남(알고보면 부드러운 남자)’ 전략이었다. 고(故) 이희호 여사의 평전엔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텔레비전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평생 투쟁만 한 노쇠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아닌 인간 김대중의 모습을 TV토론에서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대선 TV토론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부터 시작됐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가 3자 토론을 벌였다. TV토론 뒤 김 전 대통령은 상승세를 탔고,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꺾이기 시작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DJ는 옷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쓴 반면 이회창 후보는 권위주의적 이미지만 강화됐다”고 말했다. 14대 대선 당시엔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민주자유당 후보)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앞서가는 후보는 토론할 필요가 없다”는 조언을 듣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DJ의 토론 제안을 거절한 일화도 있다.
한국 TV토론의 첫 수혜자가 DJ라면, 세계 역사상 첫 TV토론 수혜자는 고(故) 존 F.케네디 대통령이다. 1960년 9월 26일 처음으로 미국 대선후보의 TV토론이 생중계된 날, 구릿빛 피부와 유창한 언변을 뽐내던 40대 상원의원 케네디는 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던 부통령 출신의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압도했다. 당시 이 TV토론을 미국 인구의 3분의 1인 7000만명가량이 시청했다. 18대·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의 TV토론 준비를 전담했던 신경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국 대선 TV토론의 포맷은 대부분 미국 TV토론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말했다.
‘제1대 대통령후보 초청 합동토론회’가 열린 2002년 12월3일 KBS스튜디오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권영길 민주노동당후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왼쪽부터)가 토론회에 앞서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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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열린 16대 대선에선 양당 대선후보가 아닌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가 스타로 떠올랐다. 20년이 지난 아직도 정치 풍자의 소재로 활용되는 “국민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가 유명하다. 권 전 후보는 당시 96만표를 득표했다. 이 동력은 2년 뒤인 17대 총선까지 이어져 ‘국회의원 10석’이란 민주노동당 돌풍의 도화선이 됐다.
10년 만에 보수 정권으로 정권 교체가 된 17대 대선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MB·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압승이 예상돼 TV토론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MB와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예비후보) 간의 토론이 훨씬 더 치열했다. MB의 도곡동 땅과 BBK 의혹,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의혹까지도 다뤄질 정도였다.
한나라당 이명박, 박근혜 대선예비후보가 2007년 8월 16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17대 대선후보 합동 TV토론회 생방송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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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대선에선 제3지대 후보의 ‘어깃장’이 두드러졌다. 사실상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새누리당 후보)과 문재인 대통령(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에서 TV토론에 나왔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며 박 전 대통령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이런 모습에 “여자 1호와 여자 3호가 싸우는 동안 남자 2호가 놀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 대통령의 존재감은 지워졌고, 부정적 이미지만 덧씌워졌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의 TV토론을 준비했던 신경민 전 의원은 “우리도 전혀 예상 못 한 행보였다. 이 전 후보가 토론을 완전히 망쳐놨다”고 했다. 이 후보는 마지막 3차 TV토론 당일 사퇴를 하며 또 한 번 파문을 일으켰다. 이날 박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 양자토론에선 문 대통령이 선전했다. 하지만 당일 저녁 11시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국정원 여직원 감금 사건 무혐의 수사 중간 결과를 발표하며 TV토론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신 전 의원은 “우리가 졌다는 걸 그 날 직감했다”고 말했다.
2012년 12월 10일 KBS스튜디오에서 열린 2차 TV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와 인사를 나눈 후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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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대선은 '한국 TV토론 역사상 최악의 실책'이라 불리는 장면이 나왔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의 “제가 MB(이명박) 아바타입니까”“제가 갑(甲) 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발언이다. 당시 문 대통령 지지자들에게서 네거티브 공격을 받던 안 후보의 반박이었다. 하지만 너무 생뚱맞았단 지적이 나왔다. 당시 안 후보 선대위 TV토론 담당자는 “우리가 그 발언을 준비해간 것은 맞다”며 “자연스럽게 묻는 것이었지 그렇게 후보가 정색하고 할 말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당시 문 후보의 지지율에 육박했던 안 후보의 지지율은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7년 4월 28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왼쪽)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다섯 번째 대선 TV토론에 앞서 준비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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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비호감 대선’이라 불리는 이번 20대 대선에서 TV토론은 그 어느 대선보다 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TV토론은 이미 결집한 지지자들이 아닌 부동층에게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며 “이번 대선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가 많은 상황에선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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