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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슈 미술의 세계

[BOOKS] '봉쇄된 천국'에서 거장은…싹트는 겨울나무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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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가 2020년 4월 아이패드로 그린 `No. 180`. 만개한 벚꽃의 색채가 화려하다. [사진 제공 = 데이비드 호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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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유령이 유럽을 덮쳐올 때, 노년의 예술가는 봄의 전령인 꽃 앞에 서 있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2019년 봄, 노르망디로 이주했다. 전 세계 가장 비싼 생존작가('예술가의 초상'이 2018년 기록한 9030만달러)로 등극한 직후다. 여든이 된 해였다. 멜버른, 런던, 파리, 뉴욕 등 전 세계에서 순회 전시를 하면서 팝스타처럼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호크니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13년부터 3년간 그는 '82점의 초상화와 한 점의 정물화'라는 연작을 그렸다. 이 정밀한 연구는 러시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할 수 있는 파벨 플로렌스키의 발견에서 비롯됐다. 원근법이 르네상스 발명품이 아님을 주장한 이 과학자에게서 영감을 받아 그는 서구 원근법이 고집해온 직사각형 캔버스에서 벗어났다. 종이접기를 한 것처럼 6개의 다각형 캔버스를 이어 붙여 가로수길을 그리는 실험에 이어, 컴퓨터 스크린으로 사진을 조합하는 '디지털 드로잉'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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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프랑스로의 여행은 도전이었다. 호크니는 20년 만의 휴가라고 했다. 그를 유혹한 건 빛이었다. 정원이 있는 그랑드 쿠르라는 집을 얻었다. 반 고흐의 노란 집처럼 고립되길 갈망했다. 생애 대부분을 도시에서 산 그는 소박한 평온함을 갖기로 했다.

새로운 곳에서 그는 왕성하게 그림을 그렸다.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팬이 몰려들던 환경에서 벗어나 3주 만에 21점의 드로잉을 그렸다. 옆에는 반려견 루비가 늘 함께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나무가 있었다. 벚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는 차례로 꽃을 피웠다. 스무 살은 더 젊어진 듯한 활력을 되찾았다. 지팡이도 던져버렸다. 작업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그는 낙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역병이 찾아왔다. 호크니가 25년 지기인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와 책을 함께 펴냈다. 둘의 대화를 담은 첫 책 '다시, 그림이다'와 2018년 '그림의 역사'라는 그림 동화책을 함께 낸 이후 세 번째 작업이다. 케임브리지와 노르망디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전화와 소포는 물론 거의 매일 자신의 작품을 이메일로 보내며 둘은 교류를 이어왔다. 이번 책도 노르망디에서 호크니가 편지를 보내오면서 시작됐다. 삶과 예술에 관한 둘의 대화를 담은 이 책에서 게이퍼드는 거장이 새로운 열정에 빠져드는 모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한다.

게이퍼드는 호크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극심한 대유행병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호크니는 친구에게 지질학, 천문학, 문학과 광학, 유체 역학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코로나19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역병은 노르망디의 삶에 침투하지 못했다. 그곳은 '봉쇄된 천국'이었다. 호크니는 렘브란트의 조언을 따랐다. '여행을 다니지 않는 삶' 속에서 작업에 몰두했다. 피카소, 뒤샹, 렘브란트, 브뤼헐이 그의 스승이었지만 이곳에선 싹을 틔우는 겨울나무를 쫓았다. 귀가 어두워 표정을 봐야 하는 호크니와의 대화는 페이스타임을 통해 지속됐다. 2020년 4월에 그린 벚꽃이 만개하는 나무 그림은 반 고흐만큼이나 색채가 화려하다.

코로나19가 도시를 습격한 4월, 호크니는 말한다. "이 상황은 때가 되면 끝날 겁니다. 그다음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나는 거의 여든세 살에 가깝고 언젠가는 죽게 될 겁니다. 죽음의 원인은 탄생이죠. 삶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음식과 사랑입니다. 내 강아지 루비에게 그렇듯이 바로 그 순서대로입니다. 나는 이 점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예술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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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의 반려견 루비와 작업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제공 = Jean-Pierre Goncalves de L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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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의 발언 중 가장 선언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탄생을 위한 죽음의 상징이 그가 반복해 그린 겨울나무였을 것이다. 물리적인 여행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내면의 공간을 탐구해야 한다. 노르망디에서 매일 한 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며 그는 자신을 잊어버리는 몰입을 경험했다.

컨스터블, 반 고흐, 모네, 호쿠사이 같은 미술은 물론 바그너의 음악, 소설가인 플로베르나 줄리언 반스까지 호크니가 매혹된 예술에 관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수다를 이어나간다. 여든 셋의 호크니는 열정의 분출에 따라 움직였다. 해돋이와 해넘이를 그리고, 보름달을 그리고, 1년 내내 벚나무를 그렸다. 봉쇄가 이어진 이 시기 동안 호크니는 더 작고 작은 세상 안에서 더 많고 많은 것을 발견했다. 게이퍼드는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고 말한다.

마지막 만남에서 게이퍼드는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작업활동을 펼치지 않았느냐고. 거장의 답은 우리가 재난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서 한 해 더 머물 작정입니다. 또 한 번의 봄과 여름, 가을을 맞을 겁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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