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시네마 클래식]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리뷰입니다.

2021년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시간적으로 두 편의 연극을 품고 있는 구조다. 다시 말해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는 장면에서 출발해서 다음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대목에서 끝난다.

영화의 문을 여는 앞의 작품이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언제 오리라는 기약도 확신도 없는 고도를 기다리면서 연극의 등장 인물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어찌 보면 목적도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 순간들의 집합이 연극의 전부다. 종교적 구원이든 정치적 해방이든 끝내 도달하지 않는 순간에 대한 기다림을 등장 인물들은 감내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삶의 은유일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조선일보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고도를 기다리며’)

영화는 초반부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2막 마지막 대사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연극의 끝이 사실상 영화의 시작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살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시도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어쩌면 삶이란 죽음이 잠시 유예된 순간일지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이 연극에서 맡은 역할이 블라디미르다. 영화에서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다.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아내의 불륜 상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원작 소설의 자궁암이라는 설정이 영화에서는 지주막하출혈(蜘蛛膜下出血)로 바뀌어 있을 뿐, 온전하게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가후쿠의 처지는 같다. 하루키 소설의 묘사처럼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그의 생업”이다. 하지만 가후쿠는 무대 밖에서도 여전히 배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인공의 삶은 이중의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지독한 부조리야말로 영화의 출발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同名) 단편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한글판으로는 60쪽에 불과하다. 감독은 여기에 같은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다른 두 편의 단편을 녹이고, 등장 인물의 전사(前事)와 후일담을 덧붙여 3시간의 장편 영화로 펼쳐 냈다. 장장 5시간 28분에 이르렀던 2015년 영화 ‘해피 아워’가 보여주듯이 본래 감독의 장기는 압축과 생략이 아니라 확장과 여백에 있다. 얼핏 듬성듬성하게 보이는 그의 영화에서 숨은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인 매력이다.

평범한 여고생이 좋아하는 남학생의 빈집에 몰래 들어가는 사연을 들려주는 하루키의 단편 ‘셰에라자드’는 가후쿠 부부의 침실 대화로, 아내의 불륜을 정면으로 목도하는 단편 ‘기노’는 가후쿠의 이야기로 영화에 녹아들었다. “현실과 추측, 관찰과 몽상이 구분하기 어렵게 뒤섞여 있는”(’셰에라자드’) 작가의 소설적 특징은 이 단편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음악이다. “음악에는 그렇듯 기억을 생생하게, 때로는 가슴 아플 만큼 극명하게 환기해내는 효용성이 있다”는 단편 ‘예스터데이’의 구절은 실은 작가 자신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가 비틀스의 중기 곡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인 것처럼 이 단편의 제목도 비틀스의 같은 음반에 실린 노래 이름에서 가져왔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의 배경이 노르웨이가 아닌 것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운전이라는 테마만 가져왔다. 어쩌면 하루키는 비틀스의 곡명을 끊임없이 음차(音借)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곧장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들었다. 그가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좋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싫증나지 않는 음악인데다 들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 혹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

이처럼 음악적 취향을 통해서 주인공의 습성과 성격까지 드러내는 방식은 원작인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마찬가지다. 원작 단편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는 주인공 가후쿠의 성격이나 일상을 묘사하는 장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 쓰인다.

턴테이블에 올려 놓은 레코드판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들은 얼핏 주인공의 평온한 일상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 클래식 음악이 종종 상징하는 것처럼 그 일상은 너무나 깨어지기 쉬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모차르트의 ‘론도’(K.485)는 아내의 정사 장면에서, 베토벤의 현악 4중주 3번은 그 뒤에 힘겹게 복귀한 일상에서 흐른다. 두 곡 모두 같은 턴테이블에서 흐른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흡사 아물지 않은 채 서둘러 봉합한 가후쿠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시작이 ‘고도를 기다리며’였다면 그 끝은 체호프의 ‘바냐 야저씨’다. 19세기 러시아의 단조롭고 무기력한 일상에서 권태와 체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체호프의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찬가지로 이 연극에서도 자살을 뜻하는 ‘목 매달기’라는 대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여기서 달라진 건 주제가 아니라 표현 방식이다. 베케트가 등장 인물의 내면적 고통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면, 체호프는 대사를 통해서 기꺼이 무대로 끄집어낸다.

조선일보

체호프 희곡선. 을유문화사


“바냐 아저씨,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도, 그리고 늙어서도 안식을 잊은 채 일할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 무덤 위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노라고.”(‘바냐 아저씨’)

연극 속 소냐의 긴 대사를 영화는 극중 한국어 수어(手語)를 사용하는 배우 유나(박유림)에게 맡긴다. 영화는 한국과 중국·일본 등의 배우들이 각자의 언어로 연기하는 다국어 연극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소통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소냐의 긴 대사 역시 모국어나 외국어의 물리적 소리를 제거한 채 오로지 수어로 전달한다. 영화나 극중 연극을 보는 비장애인 관객들은 침묵 속에서 자막을 통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게 된다. 고통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감내하는 것임을 우리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열린 결말이 아니라 닫힌 결말이기에 상당한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끝끝내 걸작이 된다.

[김성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