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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10층’석탑은 ‘13층’이다”…한성의 흉물에서 유일한 볼거리가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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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원각사탑 공식 명칭은 ‘국보 원각사지십층석탑’(이하 원각사탑)이다. 남동신(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10층이 들어간 명칭이 세키노 타다시의 10층설과 이후 다층설 등 “전제의 오류 위에 구축”된 것이라고 본다. 남동신은 10층설·다층설을 폐기하고, 대원각사비(이하 원각사비) 기록을 근거로 13층설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 간행물 ‘미술잡지’ 100호에 기고한 논문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에서 “원각사탑이 13층탑으로 건립됐다는 근거가 명백한데도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 100년이 넘도록 13층설은 단 한 번도 공인받지 못했으며, 학계에서 층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근대 건축학자(세키노)가 아니라 창건주(創建主) 관점에 서서 원각사탑의 층수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했다. 그는 여러 근거를 들어 이 논거를 펼쳤다. 다음은 남동신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10층설의 기원

세키노는 근대건축학의 이름으로 원각사탑을 최초로 학술 조사한 이다. 동경제대 공대 조교수로 재직하다 1902년 7월 한국을 찾아 여러 건축을 조사했다. 이듬해 9월 원각사탑에 관한 짧은 논고를 발표했다. 그는 이때 원 순제(順帝)가 지정(至正) 8년(고려 충목왕 4년, 1348년) 경천사탑과 원각사탑을 제작해 고려로 보냈다는 <금릉집>의 설을 받아들였다. 13층설을 속칭이라 치부하고 ‘3중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 올려진 대리석탑’이라는 10층설을 최초로 제기했다. 이 설이 120년 동안 원각사탑 명칭에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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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신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갈무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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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층설의 근거

원각사비(1471년)에는 세조가 원각사탑을 ‘13층탑’으로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실린 ‘원각사비’에서도 ‘탑 13층을 세웠다’라는 구절이 확인된다. <동국여지승람> 편찬자들은 원각사탑의 모범인 경천사탑이 ‘13층탑’임을 인식했다.

세키노보다 먼저 원각사탑을 조사한 이가 후에 식민지 교육을 추진한 교육관료이자 역사학자 시데하라 타이라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의 학부고문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그는 경천사탑과 원각사탑 모두 원에서 가져온 것으로 간주했는데, 현지 조선인들의 전문을 받아들여 두 탑 모두 13층탑이라고 했다. 원각사비가 세조 10년 원각사 재흥과 관련 있다는 글도 남겼다. 그는 이후 13층설을 견지했다.

1906년 6월 도쿄제대 법대 출신의 아사미 린타로가 통감부 법무원 평정관으로 왔다. 그는 조선의 일본인들이 창립한 ‘조선고서간행회’에 참여했는데, 1909년 무렵 <속동문선>을 열람하다 ‘대원각사비명’ 중 ‘십유삼층(十有三層)’이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원각사비 앞 뒷면은 탑 층수와 관련된 구절은 마멸이 심해 판독이 힘든데, 문헌 자료로 층수를 확인한 것이다. 1908년 한국에 다시 온 세키노는 이듬해 아사미의 발견을 반영했다. 건립 주체와 시기, 탑 층수의 자기 기존 견해를 모두 수정한 것이다. ‘파고다공원’(탑골공원)의 원각사탑은 세조가 경천사에 있던 고려 말 13층 석탑을 모방해 건립한 13층의 대리석탑임을 분명히 했다.

1913년 세키노는 다시 13층설을 다시 바꾸어 다층석탑(탑신이 여러 층으로 된 탑)이라는 다층설을 처음 제기했다. 이후 세키노는 이 설을 끝까지 고수했다. 1934년 5월 원각사탑은 보물 제4호로 지정되면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3층설과 10층설을 절충해 모호한 ‘다층’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원각사탑을 13층탑이라고 인식했다. 한국미술사 개척자인 고유섭(1905~1944)은 처음엔 다층설을 받아들이다가 13층설로 정정했다.

■해방 이후 층수는

1961년 12월 군사정권 최고회의는 문화재보호법안을 심의 통과시켰다.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해 설치한 문화재위원회는 이듬해 7월12일 제6차 회의에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을 국보 4호로 지정했다. 11월23일 제17차 회의에서 ‘원각사지다층석탑’을 ‘원각사지10층석탑’으로 수정 의결했다.

남동신은 이 논문에서 현재 10층설은 김원용의 견해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1960년 초 경천사탑 복원 공사를 마치고, 문화재로 처음 지정할 때 조사를 담당한 김원용이 세키노의 1904년 보고서를 토대로 경천사탑을 10층탑’이라 확정했다. 1962년 17차 회의에서 1934년 이후 다층탑으로 불리던 원각사탑의 명칭을 그 모범인 경천사탑에 준하여 다시 10층탑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이때 확정된 경천사탑과 원각사탑 두 탑의 10층설이 대중화하면서 60년 동안 정설로 자리 잡았다.

■한성의 비미이자 흉물

조선 왕조는 주자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채택했다. 건국 초부터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강하게 추진했다. 신왕조는 한양 사대문 안 사찰 건립을 원칙적으로 불허했다.

세조는 조선 최후의 호불(好佛) 군주다. 즉위 10년(1464) 도성 한복판에 원각사 창건 공사를 했다. 1467년 백색 대리석으로 12m 높이 불탑을 세웠다. 유교 지배층은 이 불사를 신왕조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명백한 역행으로 간주했다. 유자(儒者)들은 원각사탑이 유교적 예악 문물이 찬연한 한성의 경관을 해치는 매우 흉물스럽고 아름답지 못한 건축물이라 여기고, 반드시 철거해서 근절하려 했다. 명종 2년(1547년) 2월16일과 2월17일 각각 호조와 사간원이 “원각사의 재목과 기와를 각처 수리하는 곳에 쓰자고 했으나 불허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조 사후 원각사의 비운은 예견된 것이었다. 연산군은 원각사를 혁파하고 승려를 축출했다.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장악원(掌樂院)으로 삼도록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목조 건축물은 붕괴되거나 철거됐다.

19세기 전반의 유교 관료들도 원각사탑이 유교적 이념이 구현되어야 할 한성의 경관을 해치는 ‘비미(非美)’라고 인식했다. 영의정을 지낸 문신 남공철(1760~1840)은 고려가 복을 구하려고 부처를 숭상하였으나 끝내 멸망에 이르렀다고 경계했다. 박종희(1775~1848)도 이단에 대한 믿음을 원천봉쇄하려면 원각사탑을 철거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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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신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갈무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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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의 기이한 볼거리로

유자들의 비미와 흉물이라는 인식은 1880년대 문호 개방과 함께 들어온 서양 이방인들에 의해 크게 바뀐다. 이들은 백색의 석탑이 홀로 솟은 기이한 경관(奇觀)에 강렬한 첫 인상을 받았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성의 유일한 볼거리(偉觀)로 유명해졌다. 여러 서양 이방인들은 사진기로 이 탑을 촬영했다. 원각사탑은 당시 여행기, 보고서, 신문, 잡지, 학술 논저 등 다양한 매체에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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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신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갈무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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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재 미국 외교관이자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고종 초청을 받아 조선에 왔다. 1883년 12월~1884년 2월 서울에 체류했다. 이때 쓴 여행기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다. 그는 민가 지붕에 올라 근경의 원각사탑을 찍었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4년 겨울부터 1897년 봄 사이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다. 비숍은 원각사탑은 원래 13층이었는데, 제일 상층부의 3개 층이 300년 전 일본 침략(임진왜란으로 추정)으로 석탑 옆에 내려졌다는 구전을 채록했다. 동네 아이들이 탑에서 조각을 떼서 외지인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았다는 기록도 남겼다.

프랑스 고고학자 에밀 부르다레는 경이로운 13층탑이 시내 중심가 종로 근처의 나병 환자들 오두막촌 한복판에 오랜 세월 파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의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다. 이 기록은 이 일대가 원각사 폐사 이후 외면당하다 도시 슬럼화한 정황을 드러낸다.

제임스 게일 목사는 1889년 3월쯤 원각사탑을 배경으로 좁고 누추한 골목에 선 주민 10명을 촬영했다. 그는 1915년 김원근의 도움을 받아 원각사비를 직접 조사·판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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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신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갈무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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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탑골공원이 공원화되게 된 일에 관한 기록도 전한다. 시데하라 타이라의 증언이다. 1897년 무렵 어느 일본인이 원각사탑을 입수하려고 하자, 당시 탁지부 재정고문인 아일랜드 출신의 존 맥리비 브라운이 이를 제지하고, 고종에게 원각사탑 일원의 공원화를 건의하였다는 게 그 내용이다.

■방치된 상층부 3개 층에 관한 설설설

언젠가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이 지상으로 내려졌다. 몇 가지 속설이 내려온다. 탑 건립을 감독하던 안평대군이 정치적으로 패배하면서 미처 3개 층을 올리지 못하였다는 미완성설, 연산군 10년(1504) 도성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에서 최상부 3개 층을 지상으로 내리게 했다는 설, 중종 때 왕명으로 원각사를 철거하면서 탑을 경기도 양주 회암사로 이전하려다 중지하였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설 등이다. 19세기 서양인들 기록엔 가토가 반출을 위해 지상으로 끌어내렸다는 설이 퍼졌다. 세키노도 일본으로 돌아간 1904년 낸 조사 보고서에서 ‘구비(口碑)에 의하면 임진역(壬辰役,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이 일본으로 보내려고 내렸지만 중량이 과대하여 버리고 돌아갔다고 함’이라고 썼다.

경천사탑은 실제로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다. 1909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이 탑을 일본에 옮겼다가 국내외에서 비난 여론이 들끓자 1918년 11월 탑을 조선으로 반환했다. 경천사탑은 반출 당시 무리한 해체 때문에 크게 파손된 상태로 40년가량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됐다.

원각사탑 상층부 3개 층은 해방 후인 1946년 2월 미군 공병부대 도움으로 원위치에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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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신 ‘원각사 13층탑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갈무리.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동신의 이 논문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museum.go.kr)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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