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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朝鮮칼럼 The Column] 경제는 실험실의 청개구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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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시민단체 출신 ‘책사’들

5년마다 온갖 공약 내놓지만 성장률 하락, 분배 왜곡 심화

꾸준한 내과 치료 필요한데 단번에 수술한다며 난도질

우리 경제 만신창이 만들어

2021년 달력도 달랑 한 장 남았다. 시간은 연속적이지만 우리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 그리고 달의 공전주기에 따라 대나무의 마디처럼 인위적 단위로 분절시켜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의 한 마디가 끝나는 세모가 되면 지나간 한 해 동안 쌓인 삶의 퇴적물을 뒤적거리기 마련이다. 매번 그렇듯 올해도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된 한 해였을지라도 이런 ‘시간 되감기’가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한 마디를 위한 자양분이 되길 기원한다.

현실에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엔트로피(entropy)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열은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 전달될 뿐 반대의 과정은 발생할 수 없다. 엎질러진 커피는 다시 잔에 채울 수 없고 시간 역시 되돌릴 수 없다. 이러한 비가역성은 에너지가 변환될 때마다 ‘무질서’나 ‘무용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뭔가 일을 도모하면 그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증가되고 이에 따라 가용 에너지는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증가하는 엔트로피를 줄일 방법을 찾기 위해 수많은 학자가 ‘맥스웰의 악마(Maxwell’s demon)’라고 부르는 타개책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악마를 찾는 과정에서도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엔트로피 개념이 경제학에 도입된 지도 근 30년이 되었다. 1990년대 초반 물리학자들이 대거 재무 분야에 유입되면서 도입된 이후 경제학 전반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위험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한 가지는 리스크(risk)라고 부르는 전통적 위험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하면 받아들일 확률이 몇 퍼센트일까? 예를 들어 받아들일 확률이 40%, 거절당할 확률이 60%라고 하자. 이렇게 주어진 확률분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전에 알 수 없는 것이 리스크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러한 확률분포마저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고백 후 어떤 결과가 나오든, 예를 들어 거절당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사전에 설정한 40대60의 확률분포가 옳았는지 검증도 할 수 없다. 우리가 관측한 것은 단지 거절당했다는 경우의 수 하나에 불과한 반면 사전적으로 확률이 90대10이었더라도 거절당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률분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를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고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하에서는 엔트로피가 가장 높은 확률분포, 즉 최악의 경우를 설정해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이를 ‘로버스트 컨트롤(robust control)’이라고 한다. 송창식의 노래 가사처럼 짝사랑의 상대 입장에서는 ‘한 번쯤 말을 걸겠지’ 하면서 기다려도 상대가 도통 말을 걸어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엔트로피가 주는 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앞서 얘기했듯 뭔가 일을 도모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며 이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어떠한 정책이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 시장에 개입하게 되면 설사 정책이 성공해 그 시장의 엔트로피를 줄이더라도 다른 어느 곳에서 엔트로피가 그 이상으로 증가함에 따라 경제 전체의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책을 시행할 경우 이를 각오하고 성공 확신이 있을 때만 집행해야 한다.

대선이 코앞에 다가오니 각 후보 캠프에 교수나 시민단체 출신 ‘책사’들이 공약을 만들어 발표하고 있다. 이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무슨 대단한 공약을 만들려고 하지 말기 바란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정권마다 수많은 책사가 모여 온갖 공약을 만들어 집행해 왔지만 잠재성장률은 계속 하락하고 분배의 왜곡은 더 심화되었다. 맥스웰의 악마는 없었고 그 과정에서 엔트로피만 증가시킨 것이다. 시험 성적이 안 좋으면 어떤 문제가 틀렸는지 복기가 우선인데 매번 참고서만 바꾼 격이다. 지금 우리 경제에 필요한 건 기존 정책에 대한 정밀한 진단을 통해 효과적인 정책은 계승해 확대하고 실패한 정책은 폐기하면서 체질을 개선하는 내과적 치료다. 현실 경제 경험이 없는 교수들이나 시민단체 출신들이 책상에 앉아 쥐어짜낸 ‘재조산하(再造山河)’식 공약을 통해 외과적 치료를 하겠다며 5년마다 난도질을 하다 보니 이미 우리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경제는 실험실의 청개구리가 아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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