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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프랑스 팡테옹에 흑인 여성 최초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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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 가수, 사회운동가 조제핀 베이커

‘위대한 프랑스인들’ 영묘에 안치

미국 태생…레지스탕스 활동도


한겨레

조제핀 베이커가 1957년 5월 파리에서 공연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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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프랑스인들’의 영원한 안식처인 파리의 팡테옹에 최초로 흑인 여성이 자리를 잡는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미국 출신의 댄서이자 가수, 배우, 사회운동가인 조제핀 베이커(1906~1975)가 사후 45년 만에 팡테옹에 잠들게 된다고 30일 보도했다. 베이커는 흑인 여성으로서 최초, 연예인으로서도 최초로 팡테옹에 들어가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마리 퀴리 등 모두 80명이 잠든 곳에 여성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들어간다. 그가 미국 태생인 점도 흥미롭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베이커는 13살에 학교를 떠났고, 두 번의 결혼은 이별로 이어졌다. 1921년에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최초로 흑인들만 출연하는 뮤지컬 배우로 나섰다. 그 시대의 다른 많은 미국 흑인 예술가들처럼 인종차별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다. 베이커는 재즈 시대를 맞아 생동감 넘치는 춤으로 파리 문화계에서 입지를 다졌고 ‘검은 비너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7년에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베이커의 유족과 팬들이 추진한 팡테옹 이장이 결실을 맺은 데는 이런 인기뿐 아니라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 운동에 뛰어든 게 역할을 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총통 무솔리니 쪽에서 정보를 입수해 영국 런던에 망명 중인 샤를 드골한테 전달하기도 했다. 악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로 첩보 사항을 적는 스파이 영화 같은 활동을 했다. 차별과 맞서는 데도 열정적이었던 그는 서로 다른 인종적 배경을 지닌 아이 12명을 입양했다. 그는 “프랑스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며 “파리 사람들은 내게 모든 것을 줬다. 그들에게 내 삶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전 생애를 통해 자유와 정의를 추구한” 것을 기린다며 지난 8월 베이커의 팡테옹 이장을 결정했다. 베이커의 유해는 원래 잠들어 있는 모나코를 떠나지는 않고, 그가 살았던 세인트루이스와 파리 등 네 곳에서 퍼온 흙이 유해를 대신하게 된다. 베이커의 이름은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파리 남부 극장 근처 지하철역에도 새겨진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장식에서 연설할 예정이다. 이장식 전날인 29일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외관 조명을 프랑스 국기 색깔로 꾸몄다.

파리의 팡테옹은 18세기 프랑스 왕 루이 15세가 교회로 쓰려고 건축했으나 완공 무렵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위대한 인물들의 능묘로 용도가 바뀌었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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