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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19세기 문인이 글로 지은 상상세계를 구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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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주의 '숙수념' 번역한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주랴'

연합뉴스

숙수념을 바탕으로 완성한 그림 '숙수념도'
임경선 그림. [태학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배산임수 지형에 위험 요소는 없고 물산은 풍부한 별세계가 있다. 주인공은 정원이 딸린 저택에 거주하면서 많은 문사와 글을 쓰고 토론하며 교류한다.

이곳은 실재하지 않는 마을이다. 하지만 어떠한가. 머릿속에 마을을 구상했으니 다음에는 이런저런 규칙을 만들 차례다. 가정 운영, 산업 경영과 재물 사용, 여가 생활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다. 도서관에 채울 책과 학습 방법도 궁리한다.

조선시대 후기 문인 홍길주(1786∼1841)는 실제로 이런 작업을 했다. 그러고는 1829년 '숙수념'(孰遂念)이라는 기발한 저작을 남겼다. 홍길주는 박지원 이후 새롭고 개성적인 문학을 추구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신간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주랴'는 홍길주의 삼부작 문집을 우리말로 옮겼던 박무영 연세대 교수가 숙수념을 번역한 책이다. 숙수념이라는 말 자체가 '누가 이 생각을 이루어 주랴'를 뜻한다.

박 교수는 "숙수념은 유가적 현실성과 도가적 초월성이 얽힌 장소"라며 "이 공간의 주인인 항해자는 유가적 문예 왕국의 주인이자 도가적 지인(至人)의 모습을 함께 갖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홍길주는 세계란 하나의 거대한 책이며, 이 세계 속에서 의식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그 책에 대한 독서 행위라고 종종 말했다"며 "일상의 놀이에서부터 국가 기획까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예적 글로부터 게임 매뉴얼과 기하학 예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식의 글쓰기를 구사했다"고 강조한다.

그는 숙수념 독서가 결국 홍길주의 상상 세계를 구경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홍길주는 이러한 독자의 마음을 이해하듯, '보다'를 뜻하는 '관'(觀)이라는 말로 본문을 나누고 각 관에는 '생각'을 의미하는 '념'(念)으로 끝나는 주제어를 붙였다.

예컨대 제1관과 제2관은 '원거념'(爰居念)이고, 제3관은 '각수념'(各授念)이다. 원거념에는 공간에 대한 생각을 담았고, 각수념에서는 가정 운영을 논했다.

마지막 제16관 '숙수념'은 글을 쓴 이유, 숙수념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다양한 재해석 가능성을 정리했다.

박 교수는 "숙수념이 산만함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지닌 저작으로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본문 서술이 공간의 인접성을 바탕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라며 "숙수념의 서술을 지탱하는 인접성 원리는 수직적 깊이 대신 수평적 확산을 지향하며, 끝없이 꼬리를 물고 옆으로 미끄러진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숙수념의 형식은 숙수념이 거둔 가장 독특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며 "그 형식 속에 홍길주의 개성이 존재하며, 기존 위계를 뒤엎는 전복성도 숨어 있다"고 평가한다.

태학사. 1권 616쪽, 2권 656쪽. 각권 3만5천 원.

연합뉴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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