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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부터 국권피탈까지…근대사의 9개 질문에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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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최덕수 명예교수가 쓴 '근대 조선과 세계'

연합뉴스

프랑스 신문에 실린 조선 왕과 관리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392년 건국한 조선은 19세기 중반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해 영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고, 일본에서는 도쿄 인근 바다에 미국 함대가 출현해 위기감이 조성됐다.

프랑스 군대는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이유로 강화도에 침입했다. 병인양요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부터 조선은 외세의 압박에 시달리고, 조선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다수가 알고 있듯 조선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일본은 1910년 국권을 빼앗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1945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다.

근대사를 알아가다 보면 '조선은 그때 왜 그랬을까' 같은 다양한 의문점이 생긴다. 근대 정치사를 전공한 최덕수 고려대 명예교수는 신간 '근대 조선과 세계'에서 근대사의 중요한 질문 9개에 대해 답한다.

첫 물음은 '조선은 왜 척화비를 세웠나'이다. 척화비는 조선이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1871년 각지에 설치한 비석이다.

저자는 "대원군의 왕권 강화책에 저항하던 세력은 때마침 직면한 외세의 침략 앞에 '위정척사'를 명분으로 전쟁을 택함으로써 체제 내에 흡수됐다"며 "조선의 개방에 대한 거부감은 국내 정치적인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조선은 불과 5년 뒤인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쇄국에서 개방으로 방향을 튼 셈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도 국내 정치가 있다고 짚는다. 대원군은 1873년 실권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아들 고종이 권력을 잡는다.

저자는 "고종은 강화도 조약으로 친정 초기 미약했던 왕권에 대한 재야 세력의 비판을 차단하며 신정부의 기반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며 "고종에게 일본과의 조약 체결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어 저자는 '1882년 임오군란은 최초의 해외 반일 운동이었나', '열강은 한반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나', '고종은 왜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 기념비를 세웠나' 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는 '1910년 병합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마지막 질문으로 던진 뒤 1907년 헤이그 특사가 만국평화회의 참석에 실패하고, 고종이 퇴위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는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1910년 8월 22일 조인한 '병합조약'이 간단한 내용으로 구성된 데에는 이전에 양국이 맺은 다른 조약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또 일제가 한국 합병을 열강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한국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던 국가를 향해 최대한 기득권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한일병탄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국권피탈이 황제의 국가에서 탈피해 백성의 국가를 지향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한다.

열린책들. 296쪽. 1만8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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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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