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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적의 산물"…친족 성폭력 피해자들 증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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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의 이야기 담은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출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지난 5월 12일 청주에서 의붓아버지에게 성폭력과 학대를 당한 여중생이 친구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했다. 공분한 시민들은 청와대에 국민청원하며 가해자의 엄벌을 요구했고, 청와대는 "피해자들이 사망해 무거운 책임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친족 성폭력을 포함한 성범죄 전반에 대해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도록 더욱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가족 간의 성폭력은 너나없이 쉬쉬하며 숨기려 든다. 그리고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인류 역사가 근친 간의 성행위를 금기시해왔고, 인간이 짐승과 구분되는 점은 성욕과 번식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발간한 상담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전체 성폭력 상담 사례 912건 가운데 친족 성폭력은 87건(9.5%)으로 나타났다. 피해가 가장 많은 시기는 7~13세 어린이 때(33.3%)였다. 어느 사회에서나 성폭력 가해자의 80%는 아는 사람이고, 그중 30% 이상은 친족 성폭력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신간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는 제목만큼이나 처절한 삶의 고백이다. 이 책에는 한 가족의 자녀인데도 돌봄은커녕 성적 대상으로 취급받은 피해자 11명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실렸다.

그것은 생애사가 형성되기도 전에 삶을 박탈해버린 폭력 그 자체였다. 아빠가 딸에게 같이 잠자리를 갖자고 했고, 오빠가 벗기고 만졌으며, 할아버지가 손녀 몸의 성장점검을 했다. 폭력은 같은 공간에 살면서 지속적으로 반복됐다.

현재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걸쳐 있는 글쓴이들은 자신을 '생존자'로 여긴다. 그만큼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는 얘기다. 엄마에게 구조 요청을 하거나 속내를 털어놨지만, 이들의 엄마는 가해자 또한 가족이라는 이유로 덮어두자며 감싸기 일쑤였다.

이들 피해자는 지금도 후유증을 안고 살아간다. 일반적인 폭력이나 성폭력보다 친족 성폭력이 훨씬 더 강한 상흔을 남겨 한동안 잃어버렸나 싶었던 기억이 돌풍처럼 몰아치며 되살아나 괴롭히곤 해서다. 책의 몇몇 저자가 한참이 지난 30~40대가 돼서야 비로소 그 폭력을 떠올리고 이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 이유다.

저자들이 책을 낸 동기는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함께 냈을 때 그들이 살아온 현실과 세월이 부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봐서다. 지금 이들 생존자는 자신을 가해한 대상에게 '당신의 잘못이야'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는 누구보다 용감하다"고 외친다. 또한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안'을 청와대 민원에 올리고 광장으로 나아가 목소리를 힘차게 내고 있다.

2016년 '아주 친밀한 폭력'을 펴냈던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는 이번 신간의 추천 서문을 통해 "가정폭력은 미투의 사각지대다. 가정 내 성폭력은 더욱 그렇다"며 "이 폭력의 특징은 가족 구성원이 가해자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보호받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이들의 자기 경험을 기억하는 힘, 글을 쓰는 용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은 그 스스로뿐 아니라 세상을 바꿀 것이다"며 힘을 실어준다.

글항아리. 256쪽. 1만5천원.

연합뉴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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