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을 놓고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설명이다. 찬반이 대립하고 있지만,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반도체, 백신 분야 등에서 역할을 해야 할 의무가 사실상 주어진 셈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이후 행보는 그동안 ‘정중동(靜中動)’이었다. 이 부회장은 출소 이후 서울 서초사옥과 수원 본사 등으로 번갈아 출근하며 주요 사업 현황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 19일에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합병 및 회계부정’ 공판에 피고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이 같은 행보의 배경에는 끝나지 않은 사법리스크가 있었다. 실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참여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에서 이 부회장이 서초사옥으로 향한 것을 두고 “취업제한 규정 위반”이라며 고발하겠다고 나서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논란이 커지자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취업이라 보긴 어렵다”며 진화에 나섰다. 이 부회장이 몇 년째 무보수, 비상임, 미등기 임원으로 취업제한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지난 8월 13일 가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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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3년간 240조원 투자, 4만 명 신규고용 계획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 측도 행동에 나섰다.
삼성은 향후 3년간 반도체, 바이오, 로봇 등 첨단 산업에 총 240조원을 투자하고, 4만 명을 신규 고용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나온지 11일 만에 밝힌 대규모 투자 계획으로, 투자와 고용을 늘려 한국의 경제 및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재용 부회장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사업부를 포함한 각 사업부문 담당자와 연이어 간담회를 하며 이번 투자·고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삼성은 향후 3년간 투자 규모를 240조원으로 확대하고, 이 중 180조원을 국내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첨단 혁신 사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글로벌 산업 구조 개편을 선도하고, 과감한 인수·합병(M&A)으로 시장 리더십을 강화한다는 목표다.
삼성은 이번 투자로 메모리 분야는 ‘초격차’를 계속 늘려 절대 우위를 유지하고, 시스템 반도체 역시 세계 1위로 도약할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메모리는 단기 시장 변화보다 중장기 수요 대응에 초점을 두고 투자를 지속하고 시스템 반도체는 파운드리 선단 공정 적기 개발을 통해 글로벌 1위 도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계획이다. 아울러 기존 모바일 중심에서 AI, 데이터센터 등 신규 응용처를 겨냥해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확대하고 관련 생태계 조성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미국 제2 파운드리 공장을 비롯해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만 향후 3년간 최소 50조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투자 금액에는 대규모 인수합병(M&A)도 포함돼 있다.
삼성전자는 앞서 향후 3년간 유의미한 M&A를 진행할 계획임을 공개하고 AI, 5G, 전장 부문에서 인수 대상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차세대 통신 분야에서는 세계 최초로 5세대 이동통신(5G) 상용화를 달성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에 집중 투자하고, 신사업 영역·제품 포트폴리오 확장에 주력한다.
차세대 먹거리인 바이오도 ‘제2의 반도체 신화’를 만들 계획이다. CDMO(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 공장을 2곳 더 늘리고 백신 및 세포·유전자치료제 등 차세대 CDMO에도 신규 진출한다.
회사 측은 “전문 인력 양성, 원부자재 국산화, 중소 바이오텍 기술 지원 등을 통해 국내 바이오 산업 생태계를 활성화하겠다”며 “바이오 산업 강화로 ‘제2의 반도체 신화’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관심사인 고용과 상생 보따리도 풀었다. 삼성은 인재 인프라를 강화하기 위해 향후 3년간 4만 명을 직접 채용할 계획이다. 통상 3년간 3만 명 규모의 채용을 했지만, 첨단산업 분야 고용을 보다 늘리기로 했다. 특히 삼성은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공채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은 우리나라에서 공채를 처음 시작한 기업이다”라면서 “최근 수시채용으로 트렌드가 바뀌긴 했지만, 경기가 어려운데 고용 예측 가능성을 주는 차원에서 공채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사회공헌·교육 사업도 강화한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인 청년 소프트웨어(SW) 아카데미, 스타트업 지원 ‘C랩’ 사업을 확대해 청년 취업난 해소와 첨단 신성장 산업 육성에 기여할 방침이다.
이재용 부회장 가석방 이후 삼성이 대규모 투자를 내놓으면서 총수 경영 공백에 따른 리스크는 어느 정도 가라앉는 분위기다.
하지만 남은 과제도 만만치 않다.
세계 반도체 시장은 TSMC·인텔 등 글로벌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며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반도체를 둘러싸고 패권경쟁까지 벌어지는 양상이다.
파운드리 글로벌 1위 TSMC는 초미세공정에서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 반도체 업체들과 협력을 강화하는 추세다. TSMC는 내년에 3나노 공정 양산을 시작하며 애플, 인텔 등의 칩셋을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짓고 있는 공장에 3나노 공정을 도입할 계획이다. 파운드리 분야에선 기술력 못지않게 고객 확보가 중요하다. 글로벌 인맥을 갖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한 이유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가시적 성과는 현재로선 기대난”이라며 “미국 투자 문제만 해도 미국 정부 측과 인센티브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만큼 최대한 실속을 차리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백신 확보도 이 부회장이 풀어야 할 과제다.
업계에선 8월 말부터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생산하는 모더나 물량을 국내에 먼저 돌릴 수 있다면 백신 수급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말 정부가 화이자와 백신 공급을 협상할 때에도 화이자 회장단과 정부 협상단의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이 해외 네트워크를 이용해 안정적인 백신 공급에 기여할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삼바서 생산하는 모더나 백신, 국내로 돌릴까
재계에선 반도체 투자와 인수합병(M&A),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공급에서 이 부회장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백신과 관련해서 “정부가 할 일을 기업인에게 떠맡긴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 니케이 등 일부 외신에서는 이 부회장을 향한 이른바 ‘백신특사론’에 대해 “백신 확보가 기업의 역할은 아니다”라는 쓴소리를 내놓았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2호 (2021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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