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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성역 없는 저널리즘…미투운동 방아쇠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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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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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애슐리 저드의 회고에 따르면 20년 전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그녀를 더 페닌슐라 베벌리힐스 호텔로 불러냈다. 저드는 조찬 모임인 줄 알고 갔지만 와인스타인은 그녀를 객실까지 오게 했다. 그는 샤워 가운 차림으로 나타나 저드에게 요구했다. 자신에게 마사지를 받든지 아니면 자기가 씻는 것을 지켜보라고 말이다."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의 몰락은 2017년 10월 5일 이렇게 첫머리를 여는 한 편의 기사에서 촉발됐다. '수십 년간 하비 와인스타인이 성범죄 고소인들에게 합의금을 지불해왔다'는 제하의 뉴욕타임스(NYT) 특종이었다. 그가 세운 회사(미라맥스, 와인스타인 컴퍼니) 내부 문서와 전·현직 직원들의 증언, 피해자 인터뷰, 법률 기록, 이메일 등으로 뒷받침된 보도들은 힘이 셌다. 2015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의혹이 불거졌을 때 뉴욕 검찰의 불기소 처분으로 상황이 종결됐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튿날 와인스타인 컴퍼니 이사진 3분의 1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사흘이 지난 같은 달 8일 와인스타인은 회장직에서 해고됐다. 용기를 얻은 수많은 여성들이 뒤이어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고발했다. 전 세계를 강타한 2017년 '미투 운동'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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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역 출간된 책 '그녀가 말했다'는 단편소설 한 편과 맞먹는 3300단어 분량의 기사가 나오기까지 간난신고를 낱낱이 담았다. 이 보도로 2018년 퓰리처상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수상한 NYT 탐사전문기자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가 같이 집필했다. 최초 기사 및 후속들의 기초가 된 3년간의 취재와 수백 건의 인터뷰를 저자들은 생생히 보여준다. 2019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은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NYT의 맞수 워싱턴포스트는 서평에서 "탐사저널리즘의 현대적 고전(instant classic)"이라고 호평했다.

강자에 대한 고발이 늘 그렇듯 그 과정은 형극의 연속이었다. 기자들 동향을 파악한 와인스타인은 협박과 회유를 통해 제보자들의 입을 막으려는가 하면, 초호화 변호인단과 사립탐정 등도 동원해 기사 발행을 저지하려 했다. 책의 6~7장은 출고가 결정된 2017년 9월 29일부터 첫 뉴스가 나간 10월 5일까지를 그리며 보도를 둘러싼 도전과 응전을 전한다. 막바지에 이르러서 와인스타인은 언론을 위협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변호사를 통해 보낸 최후통첩은 지금 한국 언론들에 가해지는 공격과 꼭 닮았다.

"제 의뢰인이 직원 및 배우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에 연루됐다는 '뉴욕타임스' 및 '취재원'들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중략) 제 의뢰인은 귀측의 잘못된 기사로 인해 1억달러 이상의 손해를 입을 것입니다. 이 기사를 출판한다면 '뉴욕타임스' 측에 손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269쪽)

진창 속에서 NYT의 정통 저널리즘은 더욱 빛을 발한다. 와인스타인이 제보자들을 압박하고 기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수를 쓸 걸 알면서도 기자들은 보도 전 그에게 취재 내용을 공유했다. 공개하고자 하는 모든 혐의, 그리고 이와 관련한 일화·날짜·여성의 이름 등을 포함한 자료를 건네며 해명을 요청했다. "취재 결과를 제시하는 것은 기자들의 표준적인 관례로, 상대가 아무리 신뢰할 만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기사의 대상을 대하는 정당한 방식"이라는 이유에서다.

취재원을 기사화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제기된 혐의에 대해 취재원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출처는 어디인지를 철저히 검증했다. 법적·윤리적으로 기사화가 가능한 것만 썼다. "이런 말을 한 사람 중 기사화에 동의한 사람이 있습니까?" "또 누가 기사화에 동의했습니까?"는 와인스타인 쪽 추궁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다양하게 그리고 최대한 취재하며 기사화 범위를 확장하려고도 했다. 피해자가 기사화를 거부하면 대신 그의 옛 상사의 발언을 인용했다. 기밀 유지 조항에 묶여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실을 수 없었던 로즈 맥고언에 대해선 그가 와인스타인과 1997년 체결한 합의서 사본을 입수해 활용했다. 핵심 인물이었던 저드에 대해서는 수차례 설득한 끝에 보도 이틀 전 실명을 밝혀도 된다는 허락을 구했다. 이 순간 캔터는 울면서도 의연하게 답한다. "기자로서 저에게 이보다 의미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저작은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언론의 본령을 다시금 상기한다. 어떤 전문가는 언론보다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알려주고, 어떤 유튜버는 언론보다 더 재미있는 소식을 전할 수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언론의 감시견 역할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역량과 보도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엄격한 절차를 갖춘 곳은 이처럼 언론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저널리즘은 어떠한가. 다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주도하에 이달 중 언론중재법 개정안 통과가 전망된다. 민주당은 가짜뉴스를 막는다는 미명을 내세웠지만 현장에선 권력 비판 보도에 재갈을 물리는 악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래도 필봉은 꺾이지 않는다. 고투에도 와인스타인의 혐의는 결국 보도됐다. 2018년 그는 1급 강간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1심 법원은 지난해 3월 징역 23년형을 선고했다.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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