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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이 4대조 제사 전담하는 풍습, 18세기 이후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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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긍식 서울대 교수가 쓴 '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

연합뉴스

추석 차례상 차리기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에는 흔히 종손(宗孫)이 집안 제사를 모두 모셨다고 알려졌다. 종가에서 남자 형제를 중심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까지 4대조 제사를 올리는 전통은 언제 생겨났을까.

역사적 맥락에서 법을 연구하는 정긍식 서울대 법대 교수는 신간 '조선시대 제사승계의 법제와 현실'(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펴냄)에서 "종손이 4대를 제사 지내는 풍습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변혁기에 주자학, 주자가례와 함께 이 땅에 들어와 16∼17세기 과도기를 거쳐 18세기 이후에야 정착됐다"고 주장한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는 사회 체제가 상당히 달랐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제사도 전기에는 성별이나 형제 순서와 관계없이 돌아가며 담당했으나 후기로 넘어가면서 장자가 전담하는 형태로 변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인 권내현 고려대 교수도 최근 펴낸 책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에서 16세기 조선은 완전한 장자 우대 사회가 아니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저자는 16세기 이전 제사 관습에 대해 "여러 자녀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고, 외손도 제사를 맡았으며, 양자를 들이는 입후(入後)는 드물었다"며 "이러한 현실은 혼인 후에 남자가 처가살이하는 풍속이 그 토대를 이뤘다"고 설명한다.

그러다 16세기 중엽에 신랑이 처가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혼례를 하는 친영례(親迎禮)가 등장하면서 제사 방법에 변화가 시작됐다고 분석한다.

그는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에 명분론이 강화됐다고 이야기한다. 아울러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양반들이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과정에서 부계 혈연집단인 동성(同姓) 촌락이 형성되고, 종손 중심의 제사가 자리 잡았다고 진단한다.

명분론은 첩의 자식이 제사 승계에서 점점 더 배제되도록 했고, 남성이 처가살이하는 대신 부인을 데리고 와 살게 되면서 딸과 외손이 제사에서 차츰 멀어졌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공유자원을 개인 자율에 맡기면 자원이 남용된다는 '공유지의 비극'처럼 제사를 돌아가면서 모시는 관행은 제사의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했고, 결국 종손에게 제사의 모든 책임을 지우고 재산 상속에서 우대하는 풍속이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제사를 거행하는 주체의 변화는 자연스레 가부장제로 이어졌다. 저자는 "종가와 종손의 위상이 강화되고 경제력이 뒷받침되자 종손은 구성원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며 "종손 지위의 획득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고, 여성은 차별을 넘어 직접적 피해를 보는 등 폐단도 없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어 조선 후기의 제사 승계는 일제강점기에 확고해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지속해 종손 중심 제사를 마치 고정불변의 영원한 과거로 착각하게 됐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전통을 무조건 긍정하고 수용할 필요는 없으며, 현실 생활과 조화를 이루는 전통만 계승하자고 제안한다.

212쪽. 1만4천 원.

연합뉴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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