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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신을 대신하는 엄마? ‘그런 모성애’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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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바람직한 어머니상’이라는 환상

세간티니의 일탈하는 엄마

휘슬러의 희생하는 엄마…

가부장제가 만든 신화에 어긋나면

‘모성’은 언제나 손쉬운 비난 대상


잊을 만하면 인터넷에서 보이는 사진이 있다. 발로 우유병을 지탱한 채 아기에게 젖을 주는 남성, 아이를 벽에다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채 게임하는 남성 등 하나같이 놀랄 만한 사진이다. 하지만 이런 사진은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 아래 ‘철없는 아빠’ 유머 시리즈로 소비된다. 분명 엄마가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맘충’이라고 낙인을 찍히고도 남았을 행동일 텐데 말이다. 아빠는 괜찮지만 엄마가 철없으면 큰일 나는 이유, 바로 희생적이고 인고하는 어머니로 대표되는 ‘모성신화’가 이미 사회에 강력히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시선이 엄마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바람직한 어머니상에 어긋나는 엄마들을 누구나 거침없이 비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반니 세간티니(1858~1899)가 1891년에 그린 <욕망의 징벌>도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그림이다.

한겨레

조반니 세간티니, <욕망의 징벌>, 1891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리버풀 워커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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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벌당하는 ‘나쁜 엄마’


앙상한 자작나무와 만년설만이 자리잡은 황량한 곳에서 여성들이 정신을 잃은 채로 공중에 떠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냉혹한 징벌의 공간이다. 산중에 고립돼 있는 이 여성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욕망의 징벌>은 세간티니가 1891년에서 1896년까지 그렸던 ‘나쁜 엄마들’ 연작 중 하나다. 즉 벌받고 있는 여성들은 엄마, 그것도 ‘나쁜’ 엄마다. 이들은 아이를 돌보지 않거나 낙태를 하는 등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거부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징벌>은 <쾌락의 징벌>로도 불리는데, 이는 곧 ‘쾌락을 즐겨서 아이를 가졌지만, 그 아이를 책임지지 않는 어머니는 징벌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함축돼 있다.

세간티니는 부성을 버린 남성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모성을 거부한 여성만큼은 나쁜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개인적 이유가 있었다. 세간티니의 어머니는 그가 5살 때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숨을 거뒀다. 고아로 설움받았던 그의 마음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특히 자애로운 어머니를 너무나 원했던 그였기에 ‘일탈하는 어머니’들을 곱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간티니에게 ‘성모 마리아’가 아닌 여성들은 ‘부도덕하고 나쁜 어머니’였다. 마침 시대 분위기도 세간티니의 그림이 다룬 주제의식과 조응했다.

그렇다면 모성신화에 충실한 ‘착한 엄마’로 지내면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있을까. ‘착한 엄마’는 아이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사랑만 퍼주면 될 것 같은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래리 넬슨 미국 브리검영대학교 교수는 2015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헬리콥터 맘(헬리콥터처럼 머리 위에 떠다니며 자녀 일에 간여하려는 엄마) 기질을 가진 부모를 둔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능력이 부족하며 또 폭음처럼 위험한 행동을 할 확률도 높다”고 말했다. 즉 엄마들이 모성애를 가져야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많이 가지면 아이가 엇나갈 수 있으니, 엄마들이 ‘알아서 적당히’ 사랑하란 뜻이다.

한겨레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정의 조화(화가의 어머니)>, 1871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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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당하는 ‘착한 엄마’


미술사에도 그런 ‘교훈’을 주는 모자관계가 있었다. 바로 미국의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와 그의 어머니 애나 마틸다 맥닐이 그 주인공이다. 휘슬러는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는데, 어머니가 휘슬러에게 모든 삶을 걸고 ‘너무 헌신’했기 때문이다. 휘슬러가 불과 15살 때 남편이 콜레라로 사망했으니, 애나는 두려웠을 것이다. 혹여나 ‘아버지 없는 아이라 제멋대로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나는 더욱 아들을 번듯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선천적 기질 때문인지, 엄마의 과도한 통제 때문이지, 휘슬러는 다른 아이보다 훨씬 반항기가 넘치는 아이로 자라났다. 당구나 치며 허송세월하고 늘 빈털터리로 살아 어머니 속을 까맣게 태우던 휘슬러는 어느 날 불현듯 예술가가 되겠다며 유럽으로 향했다. 애나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권했지만 보헤미안적인 삶을 동경한 휘슬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림을 위해선 그 어떤 낭비도 주저하지 않았던 아들이 불안했던 애나는 탐탁해하지 않으면서도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모델들을 입히고 먹이는 일을 도맡으며 아들을 도왔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휘슬러에게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부담이었고, 그만큼 자주 충돌했다. <회색과 검정의 조화> 역시 그러한 팽팽한 대립 상황에서 탄생한 그림이다. 원래 모델이 되기로 했던 여성이 약속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가뜩이나 모델료가 아깝다고 불만이었던 어머니가 대신 모델로 나선 것이다. 당시 64살이었던 애나는 관절염의 고통을 참아내며 12번이나 모델을 서주었지만, 휘슬러는 냉정할 정도의 거리감을 담아 <회색과 검정의 조화>를 그렸다. 애나를 보통의 어머니처럼 인자하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리기 싫었던 휘슬러는 쌀쌀하게 느껴질 만큼 차갑고 무표정한 엄마로 표현했다. 이후 휘슬러는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런던에 온 어머니를 잉글랜드 요양원으로 보내버렸고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휘슬러는 죄책감을 느꼈는지 자신의 중간이름에 애나의 성 ‘맥닐’을 붙였다. 사회 통념대로 성실히 ‘엄마 노릇’을 한 애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모성애에서 어느 정도가 ‘헌신’이고, 어디까지가 ‘집착’인지 몰랐던 것이 애나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느 누가 명확히 알 수 있겠는가.

이제 사회 분위기는 과거와는 달라져 모성이 되레 억압이 될 수도 있으며, 모성신화를 가부장제가 주입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집 <파라다이스> 중에 이런 구절도 등장한다. ​“모성은 존재하지 않아! 그것은 분유회사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지.” 나는 이제 아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두 아이의 엄마다. 그렇다면 나를 비롯해 ‘이젠 아이 없이 못 산다’고 토로하는 엄마들은 그저 분유회사에 세뇌된 존재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엄마는 잘 준비되고 계획된 임신을 한 경우, 이미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를 사랑할 각오가 되어 있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부터 난관과 고통이 따르긴 하지만, 그 시간만큼 애정도 쌓인다. 따라서 ‘모성애는 애초에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격’ 아닐까. 그보다는 가부장제 사회가 엄마를 아이 곁에만 꼼짝없이 주저앉히기 위해 모성애를 활용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대신 엄마를 만들었다”고 속삭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속삭임은 틀렸다. 엄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대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모성애는 있지만, 사회가 말하는 ‘그런 모성애’는 없기 때문이다.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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