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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손녀 이름 잊은 아버지에게 이 약이 ‘작은 희망’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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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신순규의 월가에서 온 편지]

FDA 승인받은 첫 치매 치료제

효능 의심돼도 주목받는 이유

조선일보

일러스트=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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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올해 91세가 된 내 미국인 아버지 데이비드 오머셔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1964년 매입한 뉴저지의 작은 집에서 열일곱 살 고양이 엘시와 함께 살고 있다. 아내는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내가 오래 전 설치해 드렸던 컴퓨터가 갑자기 고장이 난 것 같다면서 도움을 청하셨다. 컴퓨터가 시작 화면에서 멈춘 지 한 시간이 됐는데 버튼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고, 전원을 끌 수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기 코드를 뽑았는데도 컴퓨터의 화면이 그대로라고 하셨다. 나는 친절한 목소리로 그 컴퓨터가 랩톱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제야 아버지는 전기 코드를 뽑아도 컴퓨터가 꺼지지 않은 이유를 기억해냈다. 랩톱에는 배터리가 있다.

같은 날 저녁, 장인어른이 아내 그레이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잘 쓰던 아이폰의 글자가 갑자기 커지면서 자주 쓰던 앱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내는 밑도 끝도 없는 장인의 말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직접 인터넷을 검색해 해결 방안을 찾아 설명해드렸다. 장인은 올해 84세다.

언제부턴가 우리 부모님의 기억력이 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5분 전에 물어본 것을 또 물으신다. 전화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왜 자주 연락하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실 때도 있다. 손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한 시간 전에 드셨던 점심 식사가 무엇이었는지 잊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정도의 기억 상실 조짐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80대, 90대가 된 노인들치고는 아직도 정정하시니까. 특히 장인어른은 얼마 전 넘어지셔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는데, 상처 회복이 젊은 사람들보다 빠르다는 의사의 칭찬도 들었다고 했다.

내 지인 중에는 심각한 알츠하이머 증상을 앓는 부모님을 모시느라 고생하는 이가 많다. 어떤 지인은 자꾸 집을 나가려 하는 할머니를 집안 식구들이 번갈아가며 24시간 지키고 있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길을 잃기 때문이다. 큰 화재 사고를 일으킬 것 같아 ‘제발 하지 말라’고 해도 음식을 만들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 어머니, 평생 온화하다가 얼마 전부터 난폭하게 변한 할아버지를 모시는 집도 있다.

알츠하이머는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병이다. ‘끔찍하다’는 말이 일상이 된다. 노인을 집에 모시자니 다른 가족들이 괴롭고, 요양원에 모시자니 죄책감이 든다. 한 친구는 벌써 10년째 요양원에서 생활하시는 어머니가 자신을 알아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며 자신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

미국에는 약 600만 명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있다고 한다. 이 병의 진행 속도를 약간 늦추거나 증세를 일시적으로 호전시키는 약은 있어도, 병을 고치는 치료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무서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작은 희망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7일, 바이오젠사(社)가 개발한 알츠하이머 치료제 ‘아두헴(Aduhelm)’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것이다. 이 뉴스를 들은 나는 크게 놀랐다. ‘아두카누맙’이라는 성분명으로 알려진 아두헴이 FDA의 승인을 받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2019년 바이오젠은 아두카누맙의 제3차 임상시험을 스스로 중단했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다. 그런데 얼마 뒤 바이오젠은 시험 자료를 다시 검토한 결과, 복용량이 많았을 때는 효과가 있었다며 말을 뒤집었다.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약을 다시 홍보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는 신용을 잃었다고 본다.

둘째, 전문가들이 약의 효과를 의심하고 있다. 아두카누맙이 뇌의 신경세포에 달라붙는 ‘아밀로이드 베타 플라크’를 줄여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약이 알츠하이머를 치료해준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알츠하이머의 원인이 아밀로이드 베타 플라크라는 가설은 이미 신빙성을 잃고 있다. 기억력이나 인지력이 정상인 사람들의 두뇌에서도 알츠하이머 환자와 같은 아밀로이드가 발견되었고, 또 치료를 통해 아밀로이드를 줄였는데도 알츠하이머 증세가 나아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작년 11월 아두카누맙의 FDA 승인 여부를 검토한 외부 자문위원회가 승인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발표했다. 위원 11명 중 10명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고, 나머지 한 명은 판단을 유보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이 약을 승인해야 한다는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FDA가 자문위원회의 의견을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전문가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FDA 결정을 비판할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다. FDA는 바이오젠에 새 임상시험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효과가 불확실한 이 약을 5년간 판매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또 바이오젠이 1년 약값을 5만6000달러(6300여만원)라는 고액으로 정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알츠하이머 환자를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 그리고 자신도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이들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0%’와 ‘5%’의 확률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 역시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0%는 아무 희망도 없는 상태지만, 5%에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알겠는가? 아두헴이 별다른 효과가 없을지라도, 이 약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알츠하이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한 보 진전할 수도 있는 일이다. 비록 그 효능을 곧이곧대로 믿긴 어렵지만, 아두헴을 시작으로 알츠하이머 환자와 가족들에게 자그마한 ‘소망’이 생기기를 바란다.

[신순규 시각장애인·BBH 시니어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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