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11일(현지시간) 유흥식 라자로 주교를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하면서 대주교 칭호도 함께 내렸다. 500년 역사의 교황청 성직자성은 전 세계 사제와 부제들의 모든 직무와 생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교황청의 주요 부처다. 신부들의 사목 활동을 감독ㆍ심의하고, 신학교 관할권도 갖는다.
유흥식 대주교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뒤 현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덕분에 교황청의 필수 언어인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하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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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에는 9개 성(省ㆍCongregations)으로 구성된 행정기구가 있다. 각 성의 장관은 추기경이 맡는다. 현재도 모든 성의 장관을 추기경이 맡고 있다. 유 대주교도 성직자성 장관직을 수행하며 추기경 서임이 확실시된다. 지난 4월 정진석 추기경의 선종으로 인해 한국인 추기경은 염수정 추기경 1명뿐이었으나, 다시 한국인 추기경이 2명이 될 전망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 후 사제 서품까지 받아=유흥식 대주교는 1979년 이탈리아 로마 라테라노대교의신학과를 졸업했다. 사제 서품도 이탈리아 현지에서 받았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어가 능통하다. 바티칸 교황청에서 일하려면 이탈리아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능수능란해야 한다.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어를 모국어처럼 쓰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유 대주교는 부족함이 없다. 유 대주교는 대전가톨릭대 교수와 총장을 거쳐 2003년 주교품에 올랐다. 2005년 4월부터 지금껏 대전교구장을 맡고 있다.
사실 500년 역사를 가진 교황청 주요 부처의 장관에 아시아 출신 성직자가 임명된 것은 상당한 파격이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현지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제 서품까지 받은 유 대주교의 이력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며 형성한 유 대주교의 바티칸 교황청 내 인적 네트워크도 상당하다. 아시아 출신이지만 성직자성 장관직을 무리 없이 수행할 것이라 기대하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유흥식 대주교와 교황의 인연=2013년 7월 브라질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렸다.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후 첫 해외방문지였다. 유 대주교도 거기서 교황을 만났다. 유 대주교가 이탈리아어로 “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코레아?”라고 되물었다. 유 대주교가 “350명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교황은 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왼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라키에사 코레아나 에 포르테!”라고 답했다. 그건 “한국 교회는 강합니다!”라는 뜻이다. 이게 프란치스코 교황과 유 대주교의 첫 인연이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에서 유흥식 주교가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신부의 생가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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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한국을 방문했다. 대전교구에서 열린 ‘아시아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대회의 총책임자는 대전교구장인 유흥식 대주교였다.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바티칸에서는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시성식이 열렸다. 전 세계에서 1000명이 넘는 추기경과 주교가 로마를 찾았다. 추기경만 150명이었다. 그 기간에 교황 단독 면담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럼에도 그때 유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독대했다. 그것도 40분간의 단독 면담이었다.
유 대주교는 “그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교황님께 보고했더니 ‘메테레 인 프로그라마’라고 하셨다고 한다. 일정에 틈을 만들어 집어넣으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방문을 앞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각별한 배려이기도 했다.
교황 단독 면담 후에 유 대주교는 한복 입은 성모상을 선물로 드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 마돈나 코리아나!”라고 화답했다. “아, 한국 성모님!”이란 뜻이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선물 포장을 다 풀더니 교황 집무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탁자 위에 한복 입은 성모상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벨리시마!”(이탈리아어로 ‘가장 아름답다’는 최상급의 표현)라고 말했다.
유흥식 주교가 한복 입은 성모상을 선물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벨리시마(가장 아름답다)"라고 답했다. [천주교 대전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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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대주교는 자신이 “대전에서 왔다”고 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애전”이라고 발음했다. 유 대주교는 몇 차례나 교황의 “다애전” 발음을 고쳐주었다.
당시 한국은 세월호 참사가 사회적 화두였다. 유 대주교는 "젊은이들 약 3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것도 저희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부활절 성주간에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저는 그걸 하느님께 따지고 있습니다"라며 프란치스코 교황에서 물었다.
그 말을 듣고 교황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답했다. "주교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이러저런 안 좋은 것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또 그걸 통해 더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안 좋은 것들을 더 좋게, 세월호를 계기로 대한민국 국민이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때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 등에서 유 대주교는 교황을 직접 안내했다.
◇바티칸 교황청의 개혁과 변화=교황청에 머물 때 유 대주교는 교황청 직원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뷔페식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았다. 그리고 식당의 맨 구석에서 벽을 향해 앉은 채 식사를 했다. 맞은편 자리에는 비서가 앉았다. 교황은 식당 안의 사람들을 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교황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예전의 교황들은 별도의 공간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이런 방식은 처음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의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역대 그 어느 교황보다 개혁적이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이란 용어를 쓴 적이 없다. 이탈리아어로 ‘개혁’은 ‘리포르마’다. 교황은 ‘리포르마’ 대신 ‘칸비아레’라는 단어를 썼다. 그건 ‘변화’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유 대주교는 “처음부터 ‘개혁’이란 기치를 내걸면 반발이 심할 수 있다. ‘변화’라고 표현하면 거부감이 줄어든다. 밖에서 볼 때는 개혁이겠지만, 교황님은 교회 내부를 향해서 늘 ‘변화’라는 말을 쓴다”며 “‘개혁’이란 말은 거부하는 사람이 있지만, ‘변화’라는 말은 모두가 받아들인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전 세계 추기경의 3분의2 이상이 모인 바티칸의 시성식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흥식 주교에게 단독 면담 시간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당시 방한을 앞둔 각별한 배려였다. [천주교 대전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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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에 선출되자마자 8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었다. 교황청을 바꾸기 위한 위원회였다. 그런데 그 명칭을 ‘교황청 개혁 위원회’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교황청의 모든 기구를 다시 보는 기구’라고 정했다.
유 대주교는 “다시 보는 거다. 올바로 가고 있는가. 우리가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어긋나 있진 않나. 그걸 보자는 거다. 만약 어긋나 있다면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그게 교황님이 말하는 변화이고, 밖에서 보는 개혁이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교황청 주요 부처의 장관에 한국인 주교를 임명한 것도 큰 ‘변화’다. 유 대주교도 그 변화의 물결에 합류했다. 유 대주교는 12일 기자회견에서 “교황님께서도 북한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북한이 교황님을 초청한다면 북한으로서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며 “바티칸 현지에서도 저의 임명이 북한이나 중국 문제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보도가 나왔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 문제는 바티칸 교황청만의 결정 사항이 아니다. 북한 역시 교황의 방북에 대한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해야만 성사가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넘어야 할 장벽도 만만찮다. 유 대주교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유흥식 대주교는 "교황님의 방북을 주선하는 역할이 맡겨진다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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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식 대주교는 매일 아침 라디오로 바티칸 뉴스를 듣는다. 이탈리아어 방송이다. 거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듣고, 깊이 묵상한다. 그만큼 교황의 지향에 대한 이해가 깊은 셈이다. 유 대주교는 바티칸으로 출국해 8월 초부터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직을 수행한다. 교황청의 변화, 가톨릭의 변화. 종교의 변화, 세계의 변화를 위해 한국인 출신 교황청 장관의 이바지가 기대된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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