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에서 울산까지 한반도 동해안과 동해 포구를 역사적 맥락으로 고찰한 책. 역사학, 지리학, 민속학, 국문학을 연구하는 학자와 문인이 필자로 참여했다.
연구 책임자인 허영란 울산대 교수는 동해를 신비롭고 위험하며 무섭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으로 평가한다. 동해안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뱃길을 통해 문물 교류가 이뤄진 땅이지만, 바다 너머에 왜구가 있어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지역이기도 했다.
허 교수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섬, 포구는 역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면서 "포구의 역사는 기존 서사가 누락시키고 있는 관점과 사실을 부각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동해 포구에 대한 역사와 동해 포구에서 바라본 역사는 물론 동해안 지형, 동해 어업사까지 두루 다룬다.
동해 포구의 생활사를 주제로 삼은 '사람과 문화의 동해포구사', 동해 포구의 풍경과 맛을 문화사 측면으로 연구한 '이미지와 상상의 동해포구사'도 함께 출간됐다.
사진·지도·삽화 등 시각 자료를 많이 싣고,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다듬은 점이 특징이다.
민속원. 412쪽. 2만5천원.
[민속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 모후의 반역 = 계승범 지음.
조선시대사 연구자인 계승범 서강대 교수가 조선 광해군 재위 시기에 벌어진 인목대비 폐위 논쟁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인목대비 폐위는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나는 명분이 된 사건이다.
광해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형 임해군을 제치고 17세에 세자로 책봉됐다. 세자가 된 뒤에는 아버지 선조의 견제를 받았고, 명으로부터 책봉을 여러 차례 거절당했다.
선조 계비인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아홉 살이나 어렸다. 인목대비가 1606년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후궁 소생인 광해군은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선조가 1608년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했다.
저자는 왕의 신임을 받지 못한 세자 출신인 광해군이 적자도 장자도 아니라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본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후궁에서 왕후로 높이는 사업을 벌였고, 인목대비는 정치적 위상이 하락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인목대비 폐위 논쟁을 충(忠)과 효(孝)라는 중요한 두 가치의 대립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폐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들이 어머니를 벌하지 못한다는 모자간 의리를 근거로 내세웠고, 찬성하는 이들은 왕이 사인이 아닌 공인이므로 효보다 충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 때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실 최고 어른이 됐고 지위도 회복했다. 조선사회가 충보다 효를 우선시하게 된 것이다. 이후 조선은 효를 중시하는 '효치'(孝治) 국가가 됐다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역사비평사. 384쪽. 1만9천800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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