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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ESC] 냉면의 가장 친한 친구는 편육? 제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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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평양냉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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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몇 년 전, 내가 페이스북에 냉면 사진을 한 장 올렸더니 거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가 날아왔다.

“야, 이 나쁜 XX아! 지금 햄버거로 해장하고 있다. ㅠㅠ 냉면이라니!”

그 녀석과 나는 ‘냉면당원’이었다. 내가 생선조림당원이라고 썼던 적이 있는데, 나는 정치적으로 날벌레라 막 옮겨 다닌다. 함께 오전 11시부터 우래옥에 첫 번째로 의기양양하게 줄을 선 적도 많고, 을지면옥 홀 아주머니가 우리 얼굴을 기억할 정도였다. (아이고,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냉면에 낮술을 먹으면 돈은 누가 번대?)

녀석이 미국에 가고 나서 툭하면 냉면 타령이 전해져 왔다. 피시통신 채팅으로, 00700으로, 새롬 다이얼패드 전화로(이거 기억하는 분 있으면 적어도 40대), 스카이프인가 뭔가 하는 역시 비슷한 인터넷 전화로, 나중엔 카톡으로 왔다. 냉면이 먹고 싶다는 호소였다. 한번은 이런 문자가 도착했다.

“여기는 냉면이라곤 찬장에 청수냉면밖에 없다. 그것도 차로 몇천 킬로를 달려서 인근 대도시 가서 사 온다. 울고 싶다….”

그는 먹는 건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고교 시절 짜장면 먹기 내기를 했다. 그는 곱빼기 세 그릇을 먹고는 가볍게 이겼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먹다 남긴 절반쯤 되는 그릇까지 먹어치우고 ‘군만두 추가!’도 때린 인재다. 김준현은 상대가 안 되고 쯔양이랑 붙어도 이길 것 같다.

미국에 살면서 그는 한국식 중국집이 없다는 데 크게 낙담했다. 동네 미국식 중국집에 한국 춘장을 들고 가, 레시피를 알려주고 기어이 짜장면을 얻어먹은 집념의 사내다. 동네 들에서 고사리를 따다가 말려서 비빔밥을 해먹은 선수다. 그런 그가 해결 못 하는 게 딱 하나, 냉면이다. 육수며 면발이며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울었다. 다른 친구가 그의 부탁을 해결해 주려고 머리를 짜냈다. 시내 냉면집에서 육수를 사다가 꽁꽁 얼려서 스티로폼 박스로 쌌다. 계절도 겨울이었다. 그 육수가 녹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세관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911 사건’ 이후의 일이다.

나의 소원은 첫째도 밤에 하는 냉면집이오, 둘째도 그렇고 셋째도 그렇다. 술 마시고 냉면 한 그릇만 딱 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그 시간에는 제대로 된 냉면집은 모두 문을 닫는다. 어떤 냉면집은 저녁 8시면 홀에서 이런다. “냉면 주문 마감입니다.” 면 삶는 솥 물 뺀다는 소리다.

지옥의 소리 같다. 다른 음식을 먹다가도 얼른 시킨다. 냉면에 마시는 소주 맛은 기막히다. 마른 수건에 물 적시듯, 차가운 육수와 소주가 섞여 내 몸에 스며든다. 소주 한 잔 꺾고, 면과 육수를 한입 붓는다. 서운하면 북한식 김치 한쪽을 먹는다. 물론 시작은 제육이다. 냉면집에서 제육이냐 편육이냐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한칼에 날려주는 직원 아주머니가 있을 때도 있다.

“제육이야. 제육.” 이유가 뻔하다. 냉면에 쓰는 고기는 여러 가지다. 소, 돼지, 닭. 여기서 조합으로 두 가지 이상을 쓸 수도 있고 한 가지만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을지면옥과 우래옥은 소만, 평래옥은 소와 닭이다. 육종마다 쓰는 방식이 다르다. 소와 닭은 국물을 낸다. 돼지고기는 국물을 쓰지 않고 고명으로만 쓴다. 그러니, 소를 뜻하는 편육은 국물이 다 빠진 거다. 돼지고기는 고명으로만 쓰기 때문에 국물이 안 빠진 거다. 자, 무얼 드시겠는가. 물론 마분지 같은 소 편육도 고유의 맛이 있다. 국물 쫙 빠진 데다가 차갑게 두어서 고목 껍질처럼 된 것도 나름의 맛이 있다는 거다. 기호에는 정답이 없다.

을지면옥, 붐비는 시간을 피해서 오후 두어 시쯤 가면 혼자 앉아서 즐기는 선수 아저씨들이 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다고 이북 출신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린다. 북의 기억을 가지고 피난 온 분들은 이미 연세가 팔십이 다 넘어서 냉면집에서는 소수다. 분단이 70년이다. 냉면집에서 보이는 노인들도 거의 서울 사람들이다. 하여튼 그런 아저씨들의 음주법을 자세히 보시라. 먼저 제육 반 접시. 졸깃한 껍질의 이 독보적인 제육을, 이 집 특제 소스에 찍어서 소주 한 잔씩. 그렇게 반병을 마시고 냉면을 시킨다. 계란에다가 남은 술을 한 잔, 고명으로 나온 편육에 한 잔, 육수에 한 잔, 결국 한 병을 비운다. 쩌르르한 소주가 육수를 타고 빨리 몸에 퍼질 것이다. 아직 밖은 환하고, 곧 재개발로 없어진다는 을지면옥의 페인트로 대충 쓴 간판 아닌 간판을 목도하면 슬퍼진다. 꼭 술 때문에 슬픈 건 아니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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