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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태평로] ‘제비뽑기’ 청와대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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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견 참석 20명 제비뽑기로, 美는 유력 언론에 지정 좌석

추가 질문 허용않는 일방통행… ‘대통령 브리핑’ 약속도 안 지켜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4주년 기자회견 이후 사흘이 지났지만 신문사에는 항의가 이어지고 있다.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도 대통령 진솔한 답변도 없는 맥 빠진 기자회견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대통령이 수시로 브리핑룸에 들러 기자들과 설전을 벌이는 외국과 비교하는 비판도 있었다. 당초 청와대는 기자회견 대신 대통령의 ‘특별 연설’을 추진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이 아닌 특별 연설은 문 대통령의 언론 기피 증세가 영향을 줬을 것이다. 특별 연설이 되면 좌석에 앉은 기자들은 들러리밖에 안 된다. 이 때문에 1시간 중 절반은 연설, 절반은 기자들의 질의·응답으로 정해졌다.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거고, 언론은 국민이 궁금한 것을 묻고 싶었다.

조선일보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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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회견이지만 준비 과정도 궤도를 크게 벗어났다. 코로나를 이유로 기자 100여 명 중 20명을 ‘제비뽑기’로 골랐다. 이 때문에 조선일보, KBS 등 국민이 가장 많이 보는 신문과 방송 기자는 회견장에 아예 들어가지 못했다. 기자회견 참석 기자를 ‘뽑기’로 고르는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백악관 브리핑룸에는 좌석이 49개 있고, 앞줄부터 AP,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사 기자의 좌석이 정해져 있다. 미국 대통령이 기자 이름을 부르며 밀도 있는 질문과 답을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문 대통령 취임 4주년 기자회견은 미국으로 치면 CNN과 뉴욕타임스 기자가 없는 회견이었다.

‘각본 없는 회견’이라는 말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20명만 대표로 회견장에 들어가다 보니 출입 기자들은 사전에 질문 주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험으로 치면 ‘족보’를 만든 건데, 청와대가 마음만 먹으면 유출될 수 있다. 게다가 기자회견의 기본인 추가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여당조차 납득 못 한 장관 후보자 문제를 묻자 대통령은 “검증 실패가 아니다”라며 청문회 제도를 탓했다. 정상적 회견이었다면 이 문제를 질문했던 기자가 “대통령이 야당 때는 도덕성에 문제 있는 후보자 낙마를 주장하지 않았느냐”고 되묻고 대통령이 다시 답변해야 한다. 그러나 추가 질문을 할 수 없으니 바로 남북 관계, 검찰 문제 등 다른 화제로 계속 넘어가며 수박 겉 핥기 같은 질문만 오갔다. 기자도 답답한데 이를 지켜본 국민은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겠나.

코로나 이전이던 2018년 1월에는 200여 기자가 모두 기자회견장에 들어갔다. 발 빠른 기자가 앞줄에 앉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제비뽑기’다. 대통령 1명과 기자 200여 명에게 제대로 된 기자회견을 기대하긴 어렵다. 질문 한번 해보겠다고 어떤 기자는 인형을 흔들었고, 한복을 입었고, 휴대폰과 부채를 흔들었다. 20명을 ‘제비뽑기’로 고르고, 200명이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100m 달리기를 하는 코미디가 반복됐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거짓이 됐다. 불통(不通)이라고 했던 보수 정부 때보다 못하다는 통계도 있다. 기자협회보는 역대 기자회견과 브리핑을 합치면 김대중 150회, 노무현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8번 회견을 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기피하면 최대 피해자는 대통령 자신이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준비하며 국정을 돌아보고 기자들의 질문에서 여론을 읽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8년 재임하며 158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퇴임식에선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를 단련시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8번 회견은 대통령이나 언론 모두에 독(毒)이 됐다. 그 결과는 부동산 등 정책 난맥과 내로남불, 오만이다.

[정우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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