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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이 한장의 마임] ‘빈손’일 때, 비로소 얻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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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장의 마임] 마임 인생 50년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 공연하는 유진규

조선일보

마임이스트 유진규의 '빈손' /프로젝트그룹 결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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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손으로 세계를 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마임(mime·무언극) 인생 50년을 맞은 마임이스트 유진규(69)는 대표작으로 ‘빈손’을 꼽았다. 무엇을 가질 수 있고 무엇을 가질 수 없는가,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등 삶의 본질을 맨몸으로 파고든 작품이다. 예술의전당이 유진규에게 헌정하는 공연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5월 22~23일 자유소극장)에서 ‘빈손’을 다시 볼 수 있다.

“제목을 ‘빈손’으로 하는 바람에 돈을 못 벌었어요. ‘번 손’으로 지어야 했는데 말이야(웃음).”

유진규는 1972년 극단 에저또에서 ‘첫 야행’을 발표하며 무언극 세계에 몸담았다. 1998년 초연한 ‘빈손’에서는 상엿소리, 향, 한지, 정한수 등 우리 소리와 오브제가 지닌 상징을 끄집어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손일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몸으로 말하는 이 작품은 한국적 마임의 전형으로 유럽에서 호평받았다. 유진규는 춘천마임축제를 이끌며 세계 3대 마임 축제로 키워내기도 했다. 그가 가면 그게 길이었다.

마임은 “관객 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도 하고, 보여준 것을 다시 사라져버리게 하는 예술”(연극 평론가 안치운)이다. 세상의 속도와는 정반대로 느리다. ‘빈손’에서 유진규는 몸 움직임만이 아니라 물체와 빛, 소리와 냄새의 움직임까지 천천히 보여준다. 헌정 공연 첫날에는 ‘빈손’을, 둘째 날에는 데뷔작부터 코로나 시대를 그린 ‘모든 사람은 아프다’까지 주요 레퍼토리를 공연한다. 이틀간 예술의전당 잔디마당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야외 마임 공연을 볼 수 있고, 자유소극장 로비에서는 마임 외길 50년을 기록한 전시가 열린다.

조선일보

지난 50년 동안 몸으로 말해온 마임이스트 유진규 /프로젝트그룹 결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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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1일 연습을 끝낸 마임이스트 유진규와 나눈 일문 일답.

Q. 이번 공연의 의미는?

A. 예술의전당이 마임을 기획공연으로 선택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한국마임협의회 소속 회원은 약 60명인데 유진규 개인도 기쁘지만 한국마임계, 한국마임사에도 획기적인 일이다.

Q. 당신은 마임을 어떻게 정의하나?

A. 최근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엇을 움직임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마임을 정의한다. 표현 방식은 몸이 중심이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오브제(사물)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내가 어떤 사물에 눈길이 붙잡혔다면 나와 그 사물 사이에 소통이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Q. 1998년 초연한 ‘빈손’은 왜 자타공인 대표작인가?

A. 1997년에 뇌종양 판정을 받아 외부활동 안 하고 1년을 보냈다. 당시 뇌종양은 질병이 아니라 바깥과의 충돌을 내가 스스로 조절하지 못해 생긴 것이었다. 1년을 산에 들어가 아무 처방도 하지 않았는데 통증이 사라지고 치유됐다. 뭔가 쥐고 안 놓으려고 한 집착, 아집 때문이었다고 본다. 여하튼 그 일을 계기로 삶과 세상을 다시 보게 되면서 만든 작품이 ‘빈손’이다. 집착을 버리면 결국 빈손이 되는 것이니까. 한지, 신칼, 정화수, 향 등 우리 민족이 가진 오브제를 찾아 표현했다.

Q. ‘빈손’은 유럽 투어도 많이 다녔나?

A. 그렇다. 마임축제 중에서는 프랑스 미모스 축제와 영국 런던 마임축제가 가장 유명하다. 그 두 곳으로 포함해서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폴란드 등에서 초청받아 공연했다. 서양에서는 한국의 무속적인 소재와 사물놀이 등에 관심이 많았다.

Q. 아까 제목을 잘못 지었다고 말했는데 마임이스트들은 다 빈손인가?

A. ‘번 손’도 있다. 서커스와 저글링, 어릿광대 쪽이 그렇다. 코로나 이전에는 거리축제가 전국적으로 활발했는데 거기서 공연하는 친구들은 ‘번 손’이다. 극장에서 공연하는 마임이스트들은 빈손이고(웃음).

Q. 마임은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세상과는 다른 속도를 추구하나?

A. 내 성향이 그렇다. 우리 워크샵 프로그램 중에 ‘느리게 움직이기’라는 게 있다. 해가 질 때는 산등성이에 떨어지는 속도가 보인다. 그것이 우주의 움직임과 같은 근원적인 속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속도에 맞추면 주변의 다른 기운들을 느낄 수 있다. 서울 광화문이나 신촌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정상이 아니다. 쫓고 쫓기는 속도지. 우리 훈련 프로그램 중에 ‘번화가에서 30초 동안 가만히 서 있기’가 있다. 다들 처음엔 불안해한다. ‘내가 저 사람보다 뒤처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다. 그런데 몇 분 지나고 익숙해지면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 없이 막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마임이스트마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

Q. 어떤 방향성을 갖고 마임을 해왔나?

A. 늘 조금 앞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한 발짝 앞에 있어야 방향을 보여줄 수 있다. 앞서 가려면 어떤 무리에서 벗어나야 하고, 적당히 속도도 조절해야 한다.

Q. 예술의 존재 가치로 보면, 마임은 사회적으로 왜 필요한가?

A. 내가 처음에 마임에 빠진 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몸의 움직임만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게 진짜 있는 걸까? 안 보인다고 없는 걸까? 그런 물음들을 던졌다.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고 무엇이든 없앨 수도 있다는 게 마임의 매력이고 사회적으로도 필요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Q. 외길로 50년을 맞은 감회는?

A. 햇수 따지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일을 계기로 과거를 돌아볼 수밖에 없다. 또 앞을 내다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어떤 용기를 얻는 것 같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장이 초청을 해주고 주변에서 의미를 부여해주니까. 내 인생에는 불확실과 불만족, 자신 없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이렇게 한번 매듭을 묶는 셈이다.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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