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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삶의 창] 힙합과 능력주의의 연결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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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쇼미더머니 시즌6>. 엠넷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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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건ㅣ소설가·영화감독

예전만큼 즐겨 듣지는 않지만, 나는 ‘쇼미더머니’가 나오기 이전부터 힙합을 듣고 자란 힙합 키드이다. 나의 첫 영화 <투 올드 힙합 키드>는 10대 시절 힙합에 빠져 랩을 하던 친구들이 20대에 어떤 모습들로 살아가고 있는지 꿈과 현실에 대한 고민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으로 영화제에 갔을 때 나보다 윗세대인 모 감독님이 “이 영화를 보고 상처받는 젊은이들이 있을 수 있어요”라고 했다. 심지어 “조중동 같은 사상을 가진 영화”라고도 했다. 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도 그렇게 읽힐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수수께끼 같은 그 말은 십년간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힙합에서는 ‘허슬’하는 태도를 멋으로 생각한다. 열심히 자신을 굴려 노력하는 만큼 벌고 성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시간 낭비나 게으름은 죄악시하는 게 청교도적인 면모와도 비슷하다. 래퍼들은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내 힘으로 일궈냈다는 가사를 많이 쓴다. 처해 있던 환경이 열악할수록, 그가 헤쳐온 고난이 클수록 그가 이룬 성공이 더 멋지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 같은 건 ‘멋’이 없다.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밖으로 표출하는 힙합으로부터 나는 분명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모할 때,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스왜그를 들으면 힘이 난다.

힙합의 그런 태도는 경쟁 속에서 자라난 엠제트(MZ)세대의 가치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것을 추구하고, 성취를 뽐내는 걸 멋으로 생각하는 스왜그와 플렉스가 익숙한 세대. 물론 난 힙합 팬이고 힙합이 돈과 성공만을 노래하는 단순한 문화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 감독님이 보기에 자수성가를 예찬하는 힙합의 일면이 능력주의와 일맥상통하게 보였을 것이다.

내가 이전만큼 힙합을 즐겨 듣지 않게 된 이유도 그런 능력 만능주의적인 면모에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성공이 오롯이 자신의 공이라는 사고를 깊게 체화하면 실패에 대해서도 온전히 자신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게 된다. 그 기저에는 주어진 경쟁이 공정하다는 생각, 심지어 ‘환경을 탓하는 것은 멋이 없다’는 생각까지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전제되었을 때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이 얼어 있는 취업 시장의 상황과 상관없이 자존감을 지키기란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에스엔에스(SNS)로 타인의 성공한 삶을 엿보는 건 너무나 쉬운 시대다.

끊임없이 자신의 성공을 노래하는 힙합에 불공정한 출발선 같은 것은 지워져 있다. 아니, 오히려 불공정한 출발선에서 이뤄낸 자수성가를 예찬한다.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성공을 이뤄낸 사람의 사례는 충분히 훌륭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나, 모두에게 너도 똑같이 하면 되잖아, 하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난 과외 하나 안 받고 내 힘으로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갔어”라고 말하는 누군가는 과외는 안 받았을지언정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10대 시절에 알바를 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펼치고 있는 논지도 이와 비슷하다. 공정을 따질 때 진정한 기회의 공평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성공에 있어서 노력만큼이나 운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때는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세상과 부딪치면서 언제나 성취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맹목적으로 능력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위대한 개츠비>의 도입부 문장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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