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2 (금)

이슈 16개월 입양아 '정인이 사건'

"어린이날도 정인이 외롭지 않게" 매일 함께하는 엄마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 수목장 찾고 일상속에서 사건 알려
양부모 1심 선고 앞두고 더 바빠진 활동
"언제 일어날지 모를 아동학대, 어른 책임"
한국일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인 어머니 이은경(왼쪽·39)·이수진(36)씨가 3일 오후 서울 양천구 양천경찰서 앞에서 '정인이 사건' 양부모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정인이 사진과 함께 '정인이를 기억해주세요'란 문구를 적은 인쇄물을 몸에 둘렀다. 한진탁 인턴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정인이가 잠든 수목장을 매일 찾는 엄마들이 있다. 경기 남양주시에 사는 김현주(35)씨는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세 명의 엄마와 정인이 수목장을 찾아 작은 상을 차렸다. 정인이 홀로 어린이날을 보내지 않게 하려는 생각에서다.

이들은 매일 수목장을 찾아 청소와 소독을 한다. 정인이에게 늘 깨끗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건 물론, 추모객들이 안심하고 찾을 수 있게 하려는 배려다. 김씨는 "이제는 정인이가 잠든 곳이 어둡고 슬픈 장소가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밝은 장소이자 아동 학대를 막는 뜻깊은 곳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 어머니들이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4일 경기 양평군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서 정인이 묘 옆에 상을 차린 모습. 독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인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 우연히 정인이와 마주한 엄마가 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28개월 된 아이를 키우는 이수진(36)씨는 지난해 6월쯤 화곡동 한 키즈카페에서 유모차에 탄 정인이와 양모를 우연히 만났다.

그런데 아이가 이상할 만큼 얌전하다고 느껴 양모에게 "아이가 신기할 정도로 조용하네요"라고 물었지만, 양모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이씨는 "당시 유모차 덮개를 열고 정인이를 보려고 했지만 실례가 된다고 생각해 하지 않았다"며 "그때 실례를 무릅쓰고 정인이의 얼굴을 살펴봤다면 지금 정인이는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이씨는 우리 사회 평범하게 사는 이웃집의 아이가 아동학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이후 시장에 갈 때면 잊지 않고 몸에 두르는 게 있다. 생전 웃는 얼굴을 한 정인이 사진과 '정인이를 기억해주세요'란 문구가 적힌 인쇄물이다. 정인이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면 장을 보는 시간도 허투루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인이에게 어른들이 책임지는 모습 보여주고 싶어"

한국일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인 한소리(42)씨가 3일 오후 서울 양천구 양천경찰서 앞에서 '정인이 사건' 양부모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한진탁 인턴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씨는 14일 정인이 학대·살인 혐의를 받는 양부모에 대한 1심 선고를 앞두고 양부모에게 엄중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도록 다른 엄마들과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3일 양천경찰서와 경기 화성시 시내에서 정인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나선 엄마들에겐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은 느낄 수 없었다. 1심 선고에서 법정 최고형이 나와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바쁘게 움직였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거주하는 한소리(42)씨는 경찰서 앞에서 경찰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줬다. 유인물을 받지 않겠다며 주먹을 꽉 쥐고 뒷짐을 진 경찰관의 뒤를 쫓아가 한 번 더 유인물을 건넸다.

한씨는 정인이 사건으로 자주 슬픔에 잠기는 자기 모습이 싫었다. 그러나 정인이 학대 신고를 외면한 경찰들이 징계에 불복했다는 뉴스를 접한 뒤 다시 기운을 차렸다. 아이를 지키지 못한 어른들이 부끄러워하고 책임감을 갖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귀를 파며 아무 말 없이 무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경찰들도 있다. 솔직히 그땐 무섭고 자존심이 상해 상처를 받는다"면서도 "하지만 정인이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어른들이 아이의 상처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씨는 사비를 들여 서울남부지법 앞 버스정류장에 정인이 옥외 광고를 냈다.

육아·살림 시간 쪼개 정인이 사건 알리는 엄마들

한국일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한 회원이 경기 안산 중앙역 인근에서 정인이 사건 양부모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하고 있다. 장윤서 인턴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정인이 사진과 양부모·해당 기관에 책임을 묻는 피켓을 든 엄마들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경기 고양시에 사는 장민희(41)씨는 아이가 탄 유모차에 정인이 사건 규탄 인쇄물을 건 채 거리로 나선다. 한때 광고 디자이너로 일했던 최하나(39)씨는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시간 정인이 피켓을 만들어 엄마들에게 나눠준다.

경기 안산시에 사는 네 아이 엄마 김영희(38)씨도 매일 정인이 밥상을 차린 뒤 온라인에 올려 사람들과 공유한다. 정인이가 생전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학대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알리고 싶어서다.

이날 만난 엄마들은 요즘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라고 했다. 이들은 주로 아이와 남편이 집을 비운 시간에 짬을 내 활동하기에 1분이라도 아껴 써야 한다.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온 연락은 없는지 수시로 확인하면서도 유인물을 한 장이라도 더 나눠주고자 동분서주한다.

"다른 아이에게 관심 가져야 내 아이도 보호 받을 수 있어"

한국일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인 어머니들이 3일 오후 서울 양천구 양천경찰서 앞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며 '정인이 사건' 양부모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은경(39), 이수진(36), 한소리(42), 김경옥(42)씨. 한진탁 인턴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격려와 응원만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귀찮다는 눈빛은 물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관심종자(관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을 뜻하는 은어)냐'는 말도 듣는다.

사건의 제3자인 엄마들이 시간을 쪼개고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 일에 매달리는 건 어느새 정인이가 가슴 속에 품은 '내 새끼'가 됐기 때문이다. 김영희씨는 "누가 정인이를 대변해 줄 수 있겠나. 정인이를 가슴에 품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진씨는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정인이를 품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딸이 떡국을 가장 좋아하는데 어느 날 떡국을 먹다가 한 숟가락 푸더니 사진 속 정인이 입에 갖다 댔다"며 "어느 날은 정인이 사진에 담요를 덮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엄마로서, 어른으로서 한 단계 성장한 계기도 됐다. 경기 화성시에 사는 박진희(35)씨는 "내 아이는 물론 남의 아이까지 소중해져 이 일을 멈출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엄마들은 활동을 통해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자신들처럼 '아이를 지켜달라'고 외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것.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23개월 된 아이를 키우는 이은경(39)씨는 "아동학대 가해자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는 사회라면 엄마들이 이렇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며 "당연한 처벌이 내려져 정의가 바로 서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정인이 사건 이후 모든 어른이 주변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이수진씨는 "아동학대는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며 "모든 어른이 아이한테 관심을 가져야 내 아이도 보호받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류호 기자 ho@hankookilbo.com
이규리 인턴기자 leekulee@naver.com
장윤서 인턴기자 chang_ys@naver.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