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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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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선교하다 죽어서 행복합니다"...140년 전 미국 선교사들의 헌신을 추적하다 [요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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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태동 140주년
근대 이끈 초기 선교사 궤적 따라
미국 동부 '미셔너리 로드' 순례
선교사들이 남긴 인류애와 헌신
"침묵하는 한국 교회 깨울 유일한 희망"

편집자주

아는 만큼 보이는 종교의 세계. 한국일보 종교기자가 한 달에 한 번씩 생생한 종교 현장과 종교인을 찾아 종교의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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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장로교역사협회(PHS)에 걸린 한반도 선교지도. PHS는 1852년 설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기록보관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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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폭군이었던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자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 도망을 가려 했다. 그때 눈앞에 예수가 나타났다. 놀란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너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러 로마에 간다"고 답한다. 베드로는 이 대화 이후 로마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했다.

2025년은 한국 기독교가 태동한 지 140년. "한국 교회는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한국 기독교가 어디서 왔는지부터 되새겨 보는 게 좋겠다. 기독교를 전파한 백인 선교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을 찾았을까. 그들이 죽음도 각오한 헌신으로 남긴 것은 무엇일까. 한국일보는 한국 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미래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과 함께 선교사들의 스토리를 찾아 미국 동부 지역을 가봤다.

'조선의 부름'으로...고난의 땅에 심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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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 그로브 개혁교회에 남아있는 언더우드의 묘비. 그의 유해는 그의 뜻을 받들어 1999년 서울 양화진에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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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 뉴브런즈윅신학교는 조선의 첫 내한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한국 이름 원두우·1859~1916)의 모교로, 미국 최초의 개신교 신학대학이다. 언더우드는 조선의 미래가 칠흑 같았던 1885년 4월 헨리 아펜젤러(아편설라·1858~1902)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최초의 선교사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언더우드는 뉴욕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뒤 세계기독교회장을 지낸 외증조부의 길을 따라 뉴브런즈윅신학교에 입학해 조선 선교를 꿈꾸었다. 이 대학이 보유한 사료인 '언더우드 컬렉션'에는 조선에 파송돼 서울 새문안교회 등 24개 교회를 세우고 조선기독교대학(현재의 연세대학)을 설립한 선교 여정이 담겨 있다.

1908년 출판한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에서 언더우드는 한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악정과 무지, 미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나라 '뉴 코리아'를 명료하게 그린다"고 했다. 뉴브런즈윅신학교 글로벌 기독교 언더우드 센터장인 김진홍 석좌교수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더우드는 일본은 호전적이고 중국은 지나치게 상업적이어서 조선이 독자적인 사고와 창의성을 발휘하면 언젠가 세계 중심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며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늘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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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모교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신학교에는 언더우드의 선교활동을 보여주는 '언더우드 컬렉션'이 있다. 사진은 언더우드가 선교를 후원한 형 토마스 언더우드에게 보낸 편지. 편지에는 사역 내용은 물론 건강, 가정 등 사적인 이야기까지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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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와 한 배에 몸을 싣고 조선에 발을 디딘 아펜젤러의 모교는 뉴저지주 메디슨의 드루신학교다. 청년 시절 아펜젤러가 본격적으로 선교의 꿈을 키운 이 대학의 고문서실에서 그가 입학해서 남긴 친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미국에 보낸 편지와 보고서 등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곳을 찾은 아펜젤러의 외증손녀 쉴라 플랫(76)은 "할아버지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각각 감리교와 장로교로 교파는 달랐지만,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며 "두 분은 처음 1, 2년은 조선의 낯선 언어와 문화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영사전을 편찬할 정도로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혔고, 마침내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목회자로 부인과 함께 조선을 찾은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우고 최초의 한국어 세례식과 여성 세례식, 한국어 설교를 펼쳤다. 1902년 전북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를 당해 마흔넷의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아펜젤러의 묘는 그의 고향 펜실베이니아 수더튼에 있다. 그가 유년시절 다닌 임마누엘 레이디스교회 인근에 세운 가묘 뒷면에는 "한국 최초의 선교사 아펜젤러는 복음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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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가 다닌 뉴저지주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 인근에 세워진 묘지는 그의 희생을 되새기게 하는 성지다. 수영에 능통했고, 1등실에 머물러 탈출이 가능했던 아펜젤러는 여학생을 구출하러 선실로 내려갔다가 실종돼 시신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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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저지주 메디슨 드루신학교 캠퍼스에 있는 아펜젤러 선교사 흉상 앞에서 증손녀 쉴라 플랫 여사(오른쪽)와 소강석 한국교회미래재단 이사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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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교육, 번역...문명 불모지에 일군 선교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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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신학대학 도서관에 보관된 모펫 한국 컬렉션의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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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사역은 조선 근대화의 발화점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이어 조선 땅에서 활동한 초창기 선교사들은 의료, 교육, 성경 번역 등에 매진했고, 근대화를 꽃피운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새뮤얼 모펫(마포삼열·1864~1939)의 기록 본능은 방대한 컬렉션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뉴저지 프린스턴신학교 데오도르 세드윅 도서관에는 한국 장로교의 아버지로 통하는 모펫이 남긴 자료가 촘촘히 남겨져 있다. 1890년 만 26세 때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해 노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46년 동안 사진과 일기, 신문, 보고서 등을 수집해 보관했다. 반평생 모은 자료가 600여 개 상자 분량이다. 브라이언 셰틀러 프린스턴신학교 아카이브 연구원은 "프린스턴신학교는 북미에서 가장 많은 신학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모펫의 한국 컬렉션이 10%를 차지한다"며 "서울에서 가장 오래 거주했던 외국인의 관점으로 시대의 풍경을 기록했는데, 최근 K팝과 K드라마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온라인 컬렉션 접속자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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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펫 선교사가 직접 찍은 당시 교회의 모습. 모펫 한국 컬렉션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풍경을 담은 희귀 사진과 독립운동사 등 근대사에 의미 있는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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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주 리치먼드유니온장로교신학교에는 윌리엄 전킨(전위렴·1965~1908), 윌리엄 레이놀즈(이눌서·1867~1951), 클레멘트 오웬(오기원·1867~1909) 등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의 무대는 호남과 충청이었다. 1892년 남장로교가 보낸 '7인의 선교사' 중 한 명으로 조선에 온 전킨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버틸 정도로 헌신적인 선교 활동으로 유명하다. 자녀 8명 중 3명을 풍토병으로 잃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전북 전주와 군산, 전남 목포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기독교의 거점을 만들었다. 미국 남장로교의 본거지인 유니온신학교 도서관이 보유한 전킨의 딸 메리의 편지에는 43세의 전킨이 전주에서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이 남아있다. "제가 한 일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참 좋군요.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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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교인 버지니아 유니온장로교신학교. 전킨의 모교로, 초창기 조선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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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묻어 달라"던 선교사들...한국 교회가 회복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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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 당시 전킨 선교사의 가족. 그는 아들 3명을 한국 땅에서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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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을 포함한 7인 선교사들의 활동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등 수도권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교계에 따르면, 이들은 목회자이기 전에 조선의 문화와 풍습에 완전히 스며들어 가장 낮은 곳에서 민중과 부대낀 사회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이 종교를 초월한 인류애로 신앙의 기틀을 다진 호남에서 유독 개신교 비중이 높은 것과 무관치 않다. 전킨이 세운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를 졸업한 소강석 목사는 "기독교가 호남에서 부흥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나눔과 섬김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오늘날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신앙으로만 갈 수 있는, 비(非)신앙인은 도저히 가지 못할 길이 있다. 거부할 수 없는 '하늘의 명령'을 따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은 선교사들의 길도 그런 길이었다. 먼 미래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설 한국 교회를 예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들의 고향에 남은 신앙의 궤적은 민중의 삶에는 무심하면서도 차별·혐오에는 적극적인 한국 개신교를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뉴저지·펜실베이니아·버지니아=글·사진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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