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장의 '이순신이 지킨 바다'
충무공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다. 왜적과 5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이런 불패 신화는 동서고금의 해전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역대급 드라마였다.
왜군보다 수적 열세에 있던 조선 수군으로 어떻게 바다를 지켜낼 수 있었을까? 비결은 이순신 장군이 남해안의 지형뿐 아니라 조류의 흐름과 날씨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만큼 천문과 지리를 이용한 전술의 대가였다는 데 있다. 인품과 리더십이 각별했다는 점도 되새겨둘 만하다.
이봉수 서울여해재단 이순신학교 교장은 임진왜란 때 첫 승전을 거둔 옥포해전지에서 장군이 숨을 거둔 노량해전지까지 지난 25년 동안 바다 구석구석을 누비며 충무공이 온몸 바쳐 지켜낸 그날의 현장들을 생생하게 복원해 신간 '이순신이 지킨 바다'로 엮었다.
왜란이 끝난 지 420년이 흐른 지금의 바다는 명칭뿐 아니라 풍경도 간척과 개발 때문에 장군이 싸우던 그 바다와는 사뭇 달라졌다. 이에 저자는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에 등장하는 지명을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동여도 등 고지도로 찾아내고 이를 다시 현대 지도에서 확인하며 복원해냈다.
장군은 남해안의 지형뿐 아니라 조류의 흐름과 날씨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을 만큼 천문과 지리를 이용한 전술의 대가였다. 이순신 함대의 기록에 따르면, '량(梁)을 지켜 적의 진출을 막고, 포(浦)를 공격해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장군의 가장 큰 전략이었다. 착량, 사량, 노량, 명량 등의 길목에서 조선이 바다를 굳건히 지켜냈으며, 적을 공격할 때는 옥포, 합포, 적진포, 당항포, 안골포, 다대포, 부산포 등 포를 집중 공격했다.
저자는 이순신 전적지를 낱낱이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사라졌던 지명들을 새로이 찾아내기도 했다. 예컨대 현재의 '귤도'는 임진왜란 당시 '유자도'라고 불렸고, 통영반도와 거제도 사등면 사이의 좁은 해협인 '견내량'은 '갯내'로 불렸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의 비결은 뛰어난 전략전술도 있었지만 유례를 찾기 힘든 인품과 리더십 또한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각별한 부하 사랑과 뜨거운 애민 정신은 병사들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전쟁에 나서게 하는 힘이 됐다.
예컨대 벽파진해전을 치른 뒤인 1597년 9월 9일 음력 중양절에 제주 어부가 가져온 소 5마리를 잡아 춥고 배고픈 병사들을 먼저 챙겨 먹였다. 바쁘게 행군하면서도 피난민 행렬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일일이 위로했다.
칼을 맞대고 싸운 적군에게도 최소한 예의를 갖췄다. 한산대첩에서 수천 명의 왜군이 수장되고 그 시체가 바다에 떠다니자 장군은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고 산에 묻어주었다. 한산도에 있는 매왜치(埋倭峙)가 바로 그곳으로, 권력자의 야욕 때문에 동원돼 이국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영혼을 달래준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현장의 그날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기 위해 저자는 이순신 장군이 첫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지에서 최후의 승전지 노량해전지까지 무려 300차례가 넘는 현장 답사를 꾸준히 진행했다.
이를 통해 장군이 진영을 꾸렸던 장소와 해전지는 물론, 하룻밤 머물렀던 정박지까지 일일이 찾아가 이순신의 흔적들을 더듬었고, 현지 주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임진왜란 관련 사실도 새롭게 밝혀냈다.
'1592-1598 승전 현장 답사기'를 부제로 한 이번 책은 철저한 현장주의자인 저자가 오랜 답사를 통해 발굴한 '이순신 전적지 답사 코스'를 부록으로 소개한다. 고성-통영-거제 구간의 제1코스, 명량 권역의 제2코스, 노량-여수-고흥 구간의 제3코스, 부산-창원 권역의 제4코스가 그것이다.
가디언. 336쪽. 1만6천원.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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