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대체적 권리 구제 수단" 강조
재조명 받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위안부 합의 결함은 돈 아닌 '사죄' 문제"
'진정성 있는 사죄' 선행돼야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는 고 김복동 할머니 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국가면제 원칙을 인정했다. 지난 1월 일본 정부의 국가면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한 1차 위안부 판결과 정반대의 결과다. 사진은 이날 2차 위안부 선고 공판 직후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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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는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 사이의 개인적 합의가 아니고 국가 간 합의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의 대체적 권리 구제 수단이 마련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고(故) 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가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 재판부는 21일 원고 패소 결정을 내리며 이같이 밝혔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한ㆍ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 측은 10억엔(약 103억원)을 지급했다. 재판부는 이를 재원으로 생존 피해자 35명, 사망 피해자 64명(유족)이 현금을 수령한 사실도 언급했다. 특히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재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권 면제' 원칙을 인정하며 “위안부 합의에서 정한 급부가 피해자들에게 상당 부분 현실적으로 이뤄진 상황에서 국가면제에 관한 관습법이 국내법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면제(주권면제)를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날 판결과 관련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외교적인 영역에서 다뤄지던 위안부 문제가 국내 소송으로 사법적인 영역에 들어왔는데, 재판부는 한·일 양국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며 위안부 문제를 다시 외교의 영역으로 밀어냈다”며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이날 판결로 인해 일본의 배상 책임과 그에 따른 일본 자산 압류·매각 등의 절차가 한·일 간 갈등 사안으로 급격히 번지는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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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 입장 선회하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
이날 재판부의 판단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는 정부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외교부는 지난 1월 8일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1차 위안부 판결 직후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 이어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해당 판결에 대해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에 배상 책임을 묻는 판결로 인해 지난해 말부터 지속해 온 문재인 정부의 한·일 관계 개선 노력이 난관에 부딪칠 것을 우려하는 듯한 입장이었다.
외교부는 1차 판결과는 정반대의 판단이 나온 이 날 판결에 대해선 “상세한 내용을 파악 중인 바, 관련한 구체적인 언급은 자제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다시 꺼내 들었다. “위안부 합의 등에서 (일본이)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 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촉구한다”면서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난다며 2019년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고 사실상 위안부 합의를 파기한 문재인 정부가 입장을 전환해 위안부 합의 정신을 기초로 한·일 간 과거사 갈등을 봉합하려 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오늘 판결로 인해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내 일본과의 대화에 활용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조성됐다”며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이 지급한 금액 중 56억원이 남았고, 우리 정부에서 편성한 103억원도 유효한 만큼 이를 재판부가 언급한 ‘대체적 권리구제 수단’으로 보고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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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죄·반성 이끌 묘안은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줄곧 위안부 문제와 관련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했다. 피해자의 의견을 중심에 둔 해법이 도출돼야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같은 차원에선 일본의 배상과 함게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진정성있는 사죄와 사과가 선행돼야 한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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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피해자들이 강조해온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죄다. 위안부 합의에서 아베 총리는 '일본 총리대신 자격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후 이를 뒤집는 듯한 발언들이 일본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나오고, 아베 총리도 사죄편지 등 추가적 감성적인 조치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2016년 10월 중의원 예산위원회)고 선을 긋는 등 합의에서 표명한 사죄의 정신을 훼손하는 듯한 상황이 이어졌다. 외교부가 이날 판결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삼가면서도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언급한 것은 그래서다.
다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한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금전적 배상 절차를 진행하는 것과 동시에 2015년 위안부 합의의 기본 정신인 일본의 사죄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지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이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통해 사과금을 위안부 피해자에게 전달하면서 일본 총리의 사죄 서한을 전한 것과 같은 식의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사죄·반성 절차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들이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총리 차원의 사과는 2012년 이명박 정부 당시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의 해법으로 제시했던 사사에(佐佐江)안 담긴 내용이기도 하다. 사사에안에는 총리의 직접 사과와 함께 주한 일본대사를 통한 위안부 피해자 면담 및 사과, 일본 정부 예산을 통한 피해자 보상 등의 내용이 담겼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2015년 위안부 합의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사죄로, 사죄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며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이 지급한 돈 중 피해자들에 지급하고 남은 재원을 활용해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추모 기념관을 만들거나, 나아가 전시 성폭력 등 여성 인권 문제를 다루는 연구센터로 승화시키는 등 위안부 합의를 기본 틀로 하되 이를 업그레이드하는 방안이 도출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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