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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사죄합니다”… 5·18 계엄군, 총격에 숨진 희생자 유족에 첫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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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렸습니다.”

지난 16일 오후 3시쯤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입구 민주의문 접견실. 41년 전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 A씨가 당시 자신의 총격에 숨진 희생자의 유족들을 만나 무릎을 꿇은 채 사죄하며 눈물을 쏟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 장병이 목격한 사건들을 증언한 경우는 있었으나, 가해자가 직접 자신이 발포해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고 고백하고 유족에게 사과한 것은 A씨가 처음이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에 따르면, 이날 만남의 자리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 7공수특전여단 부대원이었던 A씨가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고 유족에게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조사위에 전달했고, 유족도 가해자의 사과를 수용함으로써 마련됐다.

A씨는 이날 국립5·18묘지 입구 민주의문 접견실에서 고(故) 박병현(당시 25세) 씨의 두 형제 등 유가족을 만나 “저의 사과가 또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 지난 40년간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이제라도 유가족들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울먹였다.

조선일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 유족을 만나 사죄했다. 사진은 참배 모습.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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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형 박종수(73) 씨는 “늦게라도 사과해줘 고맙다”며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용기 있게 나서줘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 편히 살아 달라”며 A씨를 안아주며 눈물을 흘렸다.

A씨와 유족들은 함께 5·18민주묘지 희생자 묘역과 고인의 묘소를 참배했다.

고인은 지난 1980년 5월 23일 농사 일을 도우러 고향인 보성으로 가기 위해 광주 남구 노대동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가다가 당시 이 지역을 순찰 중이던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의 A 씨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조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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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 유족을 만나 사죄했다. 사진은 묘역 참배 모습.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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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는 총격 당시 상황에 대해 “1개 중대 병력이 광주시 외곽 차단을 위해 정찰 등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로를 이용해 화순 방향으로 걸어가던 민간인 젊은 남자 2명이 저희들(공수부대원)을 보고 도주했다”며 “‘도망가면 쏜다'며 정지를 명령했으나 겁에 질려 도주하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사격했다”고 진술했다고 조사위는 전했다.

A 씨는 이어 “사망 현장 주변에는 총기나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이 전혀 없었고 저항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사실도 없다”며 “단순히 겁을 먹고 도망가던 상황이었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지난 2001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도 다뤄졌었다. 조사위는 당시 조사 자료를 넘겨받아 추가로 조사하던 중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고 했다.

조사위는 “최근 조사활동을 통해 A 씨의 고백과 유사한 사례를 다수 확인했다”며 “향후 계엄군과 희생자(유가족) 간 상호 의사가 있는 경우에는 적극 주선해 사과와 용서를 통한 불행한 과거사 치유 및 국민 통합에 기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송선태 조사위원장은 “A씨가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건강하게 생활했으면 좋겠다”며 “당시 작전에 동원된 계엄군들이 당당히 증언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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