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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고민은 화장실 세면대에 놓고 나와” 영주언니가 말했다, ‘베르나르다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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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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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한 장면.사진·정동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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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스페인 남부 지방의 한 마을. 여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두 번째 남편의 8년상을 치른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다섯 딸들에게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한다. 집 안에서도 팔다리를 다 가리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집 밖으로 돌아다녀도 안 되고, 집 안에서는 수를 놓으며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좁은 집 안에 꽁꽁 감춰두려 해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은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다섯 자매의 꿈틀대는 욕망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흑·백·적의 조명과 플라멩코의 박수 소리로 뜨겁게 표현된다.

2018년 초연 당시 전 좌석 매진 기록을 세운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다시 왔다. 지난달 22일부터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공연계 상황도, <베르나르다 알바>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초연 때처럼 이번에도 18명의 배우(더블캐스팅 포함) 모두 전원 여성이다.

그 중심에는 배우이자 제작자인 정영주가 있다. 그는 재연을 위해 직접 극장을 섭외하고, 해외 업체로부터 라이선스를 따내기 위해 지난한 협상을 하고, 17명의 배우를 캐스팅했다.

첫 공연 후 일주일 남짓 지난 지난달 29일 오후, 정동극장에서 정영주를 만났다. 16년차 베테랑 연극배우지만 이번에 처음 뮤지컬 무대에 오른 배우 이진경(뻬뻬·안토니오·하녀 역)과 정영주가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코로나19라는 억압 속에서 그들이 공연을 준비한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베르나르다 알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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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제작자이자 알바 역을 맡은 배우 정영주(왼쪽)와 빼빼·하녀 역의 이진경.사진·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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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석 띄어 앉기로 인해 관객이 꽉 차도 객석이 휑하던데요. 고요한 객석을 보면서 공연하시는 느낌이 이상할 것 같습니다.

이진경(이하 이) = 그렇죠. 공연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안 들려요. 관객들이 코로나19 조심하느라 정말 아무 소리도 안 내거든요. ‘관객들이 화가 난 건 아니겠지?’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끝에 가면 알아요. ‘아, 관객들이 잘 보셨구나’ 하는 거요. 눈빛이 느껴지죠.

정영주(이하 정) = 마치 100대의 카메라가 줌인, 줌아웃하면서 우리 공연을 보는 느낌? 훨씬 더 예리하게 보신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가려놔도 감동하고 눈물 나는 눈은 보이니까. 배우들이 마지막 무대 인사할 때까지 감정을 눌러 담아두고 속으로 참다가 무대 뒤에서 마이크 빼면서 흑흑흑…(웃음). 그런 작품이에요.

- 코로나 3차 유행이 정점이던 지난해 말에 공연 준비를 하셨죠. 장갑, 마스크, 페이스실드로 무장한 채 노래와 안무 연습을 하셨다고요.

이 = 저희 공연이 춤도 많고 노래도 많잖아요. 페이스실드까지 치니까 노래도 대사도 안 들려서 죽겠더라고요. 나 대사 다 했는데 왜 저쪽에서 대사 안 하지 싶어서 다른 사람에게 눈짓을 보내고 있으면, 그 사람도 왜 대사 안 하나 저를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그래도 (보호장비를) 안 낄 수가 없는 게, 나 하나 때문에 이 공연이 올스톱되면 한 5년 동안 연극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토할 것 같을 때도 절대 마스크를 벗지 않았어요.

정 = 숨소리를 안 내면서 순환호흡법으로 부르려고 해도 잘 안됐어요. 한 소절 부르고 난 다음에 숨소리가 ‘스으읍’ 크게 들어가는 식.(웃음)

이 = 숨을 잘 못 쉬니까 나중에는 눈도 잘 안 보였잖아요.

정 = 우리 연출님이 1시간 연습하고, 10분 칼같이 쉬게 하면서 대학생 수업 듣듯이 연습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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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한 장면. 왼쪽은 빼빼 역을 맡은 이진경 배우.사진·정동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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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경 배우는 첫 뮤지컬에서 뻬뻬·안토니오 등 남성 캐릭터와 하녀까지 1인 다역을 맡았습니다. 연극만 하던 배우가 뮤지컬에 합류해 쉽지 않은 배역을 맡았어요.

정 = 이 배우가 초연 때 플라멩코 조안무(안무 지도 보조)였는데, 그때부터 캐스팅하려고 마음먹었죠. 2년 동안 된장 묵히듯 마음을 묵혀뒀다가, 이번에 제안한거죠. 제가 이 배우를 ‘청정성대’라고 부르는데, 정말 호소력 있는 목소리거든요. 다른 배우들이 멋있는 뻬뻬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릴 정도였어요.

이 = 지금도 매일 무대에 설 때마다 떨리고 겁나요. 처음에는 나머지 열일곱명 배우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춤만 추라고 하면 나 날아다닐 수 있는데, 노래까지 해야 하니까 걱정됐죠. 정영주 언니나 다른 배우들에게 너무 고마운 게, 제 연기에 대해 다 생각이 있었을 텐데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지 않고 “너 하던 소리 내면 돼, 지금이 좋아”라고 모두가 말해줬죠.

정 = 저는 배우가 배우를 가르치는 게 가장 바보같다고 생각해요. 공포심을 이겨내는 노하우라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이야기해줄 수 있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가르치기보다 본인 스스로가 터득해야 돼요. 제가 가르쳐서 하면 흉내일 뿐이에요. 제가 먼저 디테일을 보여주고, 상대가 그걸 보고 알아서 터득해서 따라오게 하면 돼요. 또 <베르나르다 알바>는 메이저 무대에서 필요한 유려한 발성이 필요한 드라마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오히려 연극적 느낌이 있어요. “진경아, 노래를 못 불러도 되니까 캐릭터에 대한 고민만 해라. 그리고 고민은 집 화장실 세면대에 놓고 와라“ 했죠.

- <베르나르다 알바>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참 어려운 고비가 많았습니다.

정 = 초연 끝나고 상을 받았는데, 상 받은 기쁨도 잠시였어요. 아, 누가 제작하겠다고 덤비는 작품은 아니겠구나. 사실 프로덕션 한 곳에서 제작 제의가 있었으나, 제가 생각하는 베르나르다 알바와는 너무 괴리가 컸었고요. 재작년 12월에 극장을 섭외하고, 라이선스를 따러 다녔죠. 한 번으로 끝날 공연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름의 의무감, 책임감이 있었어요. 황석정 배우와 ‘우리가 제작할까’ 농담만 하다가, 진짜로 제가 총대 메게 됐죠.

이 = 저는 언니 보면 그냥 산이 하나 있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단단하고, 강인한 산. 산에 나무도 있고, 물도 있고 다 있잖아요. 그 산 안에서 우리는 열매도 됐고, 새도 됐고… 조화가 진짜 좋았어요. 우리는 진짜 앙상블이 끝내줬기 때문에 앙상블상 안 받아도 돼요.

정 = 안돼, 받아야돼!(웃음) 산이라는 표현 참 멋있지만, 제작하면서 제 발등 찍은 것 같아요. 배우들이 어떤 헛된 믿음이 있냐면 ‘영주 언니는 아파도 오늘 하루만 아플거야’라는 것. 제가 기초체력이 좋긴 하지만, 열일곱명 배우의 눈이 반짝반짝 저를 보고 있으니까 하루만 아프고 다음날은 툭툭 털어야 해요.

이 = 언니의 뒷모습에 연약함이 있고 힘듦이 있다는 거 사실 저희는 알잖아요. 우리는 제작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언니 믿고 열심히 잘 달리는 것밖에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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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의 한 장면. 사진·정동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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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때문에 연습 하는 내내 공연이 무대에 오르지 못할까봐 걱정도 크셨을 것 같습니다.

이 = 하고 있던 공연이 계속 취소되니까, ‘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더라고요. 작년 4월부터 공연이 취소되기 시작하는데, 한 번은 너무 허탈해서 한 2주 동안 아무것도 못했어요. 이 상황이 계속되면? 나 배우 안 하면 뭐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베르나르다 알바>도 취소될까봐 불안감이 있었지만 배우들 모두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어요. 영주 언니가 “야, 우린 고(GO)야, 우리 베르나르다 알바야!”라고 했고. 불안해도 서로를 믿고 가야 했어요.

정 = 매일 확진자수가 파도치듯 늘어나니까, 사실 저와 (정동극장) 대표도 물밑에서 덜덜덜 떨었어요.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왔어요. 괜찮은 척 했지만 얼굴에는 다 드러나니까, 배우들이 절 보고 ‘괜찮아?’라고 묻더라고요. 그래도 전 제작자니까 무너지면 안됐어요. “무릎 깨지더라도 우린 간다”고 했죠.

- 코로나19 시기에 무대에 오른 <베르나르다 알바>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요.

이 = 저는 이게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내가 막달레나(둘째 딸)일 수도 있고, 아멜리아(셋째 딸)일 수도 있잖아요. 저도 이 작품을 하면서 내가 저렇게 얄미운가, 이기적인가, 내가 저런 걸 원하나 생각해보게 됐어요. 다섯 명의 캐릭터가 가진 성격이 저에게도 하나씩은 다 있더라고요. 공연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좋겠어요.

정 = 줄거리만 보면 한 남자를 둔 세 자매의 치정극으로 아주 쉽게 오해할 수 있죠.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원하는 세상에서, 원하는 공기를 마시면서 살고 싶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죠. 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뮤지컬로 이슈가 되는 점은 너무나 감사하죠. 하지만 젠더를 위한, 젠더만의 공연이라고 생각해서 보기보다는 보편타당한 메시지에도 주목해서 봐주시면 좋겠어요.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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