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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한은형의 애정만세] 일주일에 한 번씩 꽃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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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꽃이 좋다

핼러윈에 들여놓은 메리골드처럼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나무 화분을 들였다.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살 자신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혼자 지내기는 적적했다. 당시의 나는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보다 키가 큰 대형 나무 화분을 샀다. 지금 와서 나의 행위를 분석해보자면, 나는 내가 보살필 대상이 아닌 내가 기댈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아이 엠 그루트’라고 말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그루트도 아닌데 나무에게 인격이 있는 것도 아니겠으며, 나무의 키가 크다고 작은 나무보다 더 든든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벌써 십년쯤 된 일이다.

고무나무였다. 진초록의 짙은 러플이 잔뜩 달린 그 고무나무를 꽤나 아꼈다. 한 달에 한 번 물을 흠뻑 주라는 화원 주인의 말을 지키기 위해 핸드폰 알람을 맞춰두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그런데 나무가 생기를 잃었고,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고, 검은 반점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영양제를 꽂아보기도 했고, 물주기 간격을 조정했다. 30일에서 20일로. 잎이 하나씩 떨어져 가는 고무나무를 보며 알았다. 나의 처방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그 나무는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자 손쓸 수 없게 됐다. 그렇게 반려목을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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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쯤 전,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나무 화분을 들였다. 어느 순간부터 시들시들해지던 나무는 결국 생을 다했다. 그렇게 반려목을 흘려보냈다. /게티이미지뱅크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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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십년 후, 일주일에 한 번씩 꽃을 사고 있다. 꽃이 오래가거나 여유가 없을 때는 두 주에 한 번 사기도 한다. 꽃을 산다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꽃을 살지 고르는 것도 그렇고, 꽃을 오래 보려면 아침마다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조금씩 잘라주어야 한다. 고양이나 강아지와 사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어느 정도 ‘케어’를 해야 한다.

작년 초여름, K가 거대한 택배 상자를 보내면서 이 일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꽃을 사는 생활이. 라일락 빛과 옅은 핑크빛 수국, 그리고 엄청나게 거대한 양의 유칼립투스가 있었다. 꽂기 전에 ‘물올림’을 해야 한다고 K가 친절하게 안내해줘서 나는 이 꽃들을 욕조에 담갔다. 욕조를 가득 채웠던 꽃들은 욕실 밖으로 나와 한동안 거실을 채웠었다.

K는 말했다. 화훼 농기 돕기의 일환으로 꽃을 엄청나게 사서 보내고 있다고. 운 좋게도 K의 꽃 보내기 리스트에 속하게 된 나는 그렇게 꽃으로 가득한 몇 주를 보냈다. 아침이면 화기에 담긴 꽃들을 꺼내고, 화병을 씻고,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잘라주고, 다시 화기에 꽂았다.

그러고서 나도 정기적으로 꽃을 사기 시작했다. 택배로 꽃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받은 꽃을 들고 오기도 하고 지나가다 한 송이씩 사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사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이번 주에는 백합이나 튤립’이라고 마음먹고 샀는데 매번 꽃 구매의 양상이 달라진다. ‘보라색으로 된 꽃’이라거나 ‘줄기가 가느다란 꽃’, 또는 ‘꽃봉오리가 큰 꽃’이라는 식으로 모호하다면 모호하고 구체적이라면 구체적인 이미지만을 갖고 사게 되기도 한다. 역시 가장 즐거울 때는 이야기가 있는 꽃을 사게 될 때다.

메리골드가 그랬다. 핼러윈데이쯤이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멕시코식 핼러윈이랄 수 있는 ‘망자의 날(Day oh the Dead)’ 이야기. 멕시코에서는 10월 31일부터 11월 2월까지 삼일 간이 ‘망자의 날’인데, 삼일 간 멕시코 전역이 메리골드로 뒤덮인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래서 멕시코가 주홍색 물결로 출렁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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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메리골드는 강렬한 주홍빛 색을 띤다. 냄새도 지독할 정도로 진하다. /게티이미지뱅크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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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골드는 내가 알기로 노랑색과 주홍색이 있는데, 어쩐 이유에서인지 망자의 날을 위해서는 주홍색 메리골드만 선택된다고 한다. 그래서 멕시코에서는 메리골드를 아주 대량으로 재배하는데 올해는 재배량이 확 줄었다고 했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이 죽는 시대에 ‘망자의 날’을 기릴 만한 여유가 없기도 할 것이다. 일단 살고 봐야 죽은 사람도 기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핼러윈은 전혀 기리지 않지만 망자의 날은 기리고 싶었다. 내 식대로 말이다. 나는 주홍색 메리골드 꽃으로 멕시코가 뒤덮인다는 그 날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하지만 제대로 뒤덮이지는 못할 거라는 올해의 망자의 날에 대해 듣고,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건 무료하고, 길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애도 같았다.

그래서 일단 메리골드를 주문했다. 그 주홍색 꽃을 꽂고 타코를 먹으며 메즈칼을 마셔야겠다고 계획했다. 그랬는데, 꽃은 오지 않고 전화가 왔다. 꽃 가게를 하시는 분이었다. 노랑색 메리골드만 있는데 어쩌겠냐는 전화였다. 나는 주홍색 메리골드를 주문했던 것이다. 주홍색을 원한다고 말했다. 주홍색만을 원한다고. 또, 주홍색 메리골드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일주일인가 걸려 주홍색 메리골드를 받았다. 택배 상자를 열자 향기라고는 할 수 없는 지독한, 머리를 아프게 하는 냄새가 났다. 숨을 간헐적으로 쉬며 화병에 꽂고 보니, 눈이 부셨다. 아찔한 주홍이었다. 주홍색 뭉게구름 같기도 하고, 주홍색 불꽃같기도 했다. 아무튼, 사람의 마음을 일렁이고 출렁이게 하는 마력이 있는 색채와 질감이었다. 지나다니며 화단에 핀 걸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화병에 한데로 뭉쳐놓고 보니 완전히 달랐다. 형광빛이 도는 주홍이라서 집 전체에 조명을 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주홍색 메리골드를 보름 동안 집에 꽂아놓고서 메리골드가 망자의 날을 위한 꽃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꽃 자체의 냄새가 지독하니 죽음의 냄새를 가려줄 것이고, 색은 너무 선명해서 죽은 자도 살아 돌아오게 할 만큼 강렬하고, 꽃의 질감은 구름 같기도 하고 침대 같기도 하고 불꽃같기도 해서 영원히 타오르는 깊은 잠을 상상하게 했다. 무엇보다 오래도록 생생하다.

해보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꽃들은 제각각 다 다르고, 그래서 매번 새로운 꽃들을 살 때마다 다른 감정들을 경험하게 한다. 고양이와 사는 사람들은 고양이의 성격은 다 다르다고 말하는데 꽃도 그렇다. 배가 고플 때 ‘야옹야옹’하고 우는 고양이가 있다면 ‘에웅에웅’하는 고양이가 있듯이.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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