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법원 “1억원씩” 정부 책임 첫 인정… 할머니측 “역사적 판결”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의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8년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판결도 배상의 주체는 일본 기업이었지 일본 정부가 아니었다.
법조계에선 “국제법상 확립된 ‘주권(主權) 면제’론을 정면으로 깬 판결”이란 평가가 나왔다. ‘주권 면제(국가 면제)’는 각국 주권은 평등하므로 한 국가는 다른 국가의 법원에서 피고로 소송을 당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날 “반인권적 행위까지도 재판권이 면제(주권 면제)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리 법원이 따라야 할 의무는 없지만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그동안 ‘주권 면제’에 입각한 판결을 해 왔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군수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이탈리아인 루이키 페리니가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경우, 이탈리아 대법원은 독일 정부 책임을 인정했지만 ICJ는 2012년 주권 면제론에 따라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당시 ICJ 결정에서도 ‘중대 범죄는 주권 면제의 예외’라는 소수 의견이 있긴 했다”고 말했다.
이날 판결은 이용수 할머니 등 다른 위안부 피해자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 선고 기일은 13일이다. 한 변호사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탄압 등 유사한 소송이 잇따를 수 있다”고 했다.
위안부 단체들은 “역사적인 판결에 감사한다”고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며 “국제법상 주권국가는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대로 1심 판결이 확정되면 법원은 배상금 지급을 위해 일본 정부의 국내 자산에 대한 압류 절차 등을 밟게 된다. 외교적으론 한·일 관계를 뒤흔들 대형 악재다.
한일관계 개선 시도하던 文정부 앞에… 위안부 판결 돌발변수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법원의 판결과 관련, 정부 관계자는 8일 “솔직히 한·일 관계는 답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징용 배상 문제도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그에 못지않은 큰 숙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내부적으로 ‘소송 각하’ 가능성에 무게를 두다가 예상 밖 판결에 곤혹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국민적 성원과 별개로 이 판결이 한·일 관계에 돌출 변수가 됐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는 “국제법상 주권국가는 타국의 재판권에 복종하지 않는다”며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외무성도 남관표 주일 대사를 불러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 - 8일 위안부 피해자 생활 시설인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나눔의집’앞에 피해 할머니들의 흉상들이 전시돼 있다. 할머니들의 생전 모습을 담은 흉상은 경기도의 지원으로 이행균 작가가 제작했다. 흉상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할머니들의 약력이 적혀있다.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관계 개선 노력 원점으로
이번 위안부 판결로 최근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물밑에서 진행되던 노력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일 관계는 2018년 10월 대법원의 일제 강제 징용 배상 판결 이후 악화일로였다. 일본의 수출 규제, 한국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일시 정지 등 보복성 조치가 이어지며 파탄 직전까지 갔다. 일본은 “징용 문제 해결 없이는 정상회담도 없다”는 통보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기류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문재인 정부는 도쿄올림픽을 활용해 ‘평창’ 때와 같은 평화 이벤트를 구상하고 있고, 일본도 올림픽 성공을 위해 한국 협조가 필요하다. 목적은 다르지만 양국 관계를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다는 것이다. 양국 대사의 동시 교체가 관계 개선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강창일 주일 대사는 이날 공식 임명됐고,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 대사 내정자도 이달 중 부임할 예정이다.
위안부 판결은 이처럼 미묘한 시점에 나왔다. 이번 판결은 다음 주 다른 피해자들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위안부 문제를 풀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 깊다.
남관표 주일대사 초치 - 8일 위안부 피해자 배상 판결 직후 일본 외무성에 초치된 남관표 주일 대사. /교도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지율 반전 위해 ‘강공’ 가능성
최근 양국 지도자의 지지율이 하락 국면이라는 것도 관계 개선을 더 어렵게 할 요인이 될 수 있다. 한·일 과거사 문제는 국민 감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양국 정부 모두 ‘타협’보다는 ‘강공’이 국내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문재인 정부 국정 수행 지지율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져 있고, 스가 정부도 코로나 대응 실패 등으로 출범 석 달 만에 지지율이 30%포인트 급락해 사퇴 전망까지 거론되고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양국 정권이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 한·일 관계에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향후 절차는 어떻게 되나
일본 정부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도 거부한다”고 밝혔다. 우리 법원의 판결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항소를 안 하면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 이 경우 소송에서 이긴 위안부 피해자들은 국내 일본 정부의 자산에 대한 압류 신청을 하게 된다. 이른바 ‘강제 집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측이 법원의 ‘강제 집행’ 추진에 항고 등의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실제 배상금을 받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또 이번 위안부 사건의 압류 대상은 일본 기업이 아닌 일본 정부의 자산이라 압류가 더 까다로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빈 협약 22조는 ‘각국 정부는 외국 공관의 안녕을 방해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할 책무를 갖는다’고 돼 있다”며 “일본 자산 압류 중 상당수가 ‘일본 공관의 안녕 방해’로 해석될 소지도 있다”고 했다. 교도통신은 “(한국이) 일본 정부의 자산 압류에 나설 경우 일본의 보복 조치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조백건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