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서정아 옮김/세종서적/504쪽/2만2000원
‘능력주의(Meritocracy)’만큼 공정한 것은 없어 보인다. 능력대로 경쟁해서, 능력만큼 가져가는 사회라면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더 노력하면 되고, 그만큼 성취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에서 다른 고려사항 없이 수학능력 점수대로 줄을 세우는 ‘정시’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능력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과연 현실은 그럴까. 능력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공정할까. 아니, 조금 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능력주의에 기반해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까.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돼 논란을 불러일으킨 <엘리트 세습>은 우리가 막연히 공정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능력주의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원제는 ‘능력주의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으로,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는 20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능력주의는 미국사회를 더 역동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현재 미국의 부자들 중에 이른바 ‘세습’을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소득 불평등은 과거에 비해 더 나빠졌다.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상위 1%의 가구가 전체 소득의 20%를 상위 0.1%의 가구가 전체 소득의 10%를 차지한다. (…) 195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간과 비교하면 상위 1%가 소유한 몫이 2배로, 상위 0.1%의 몫은 3배로 늘어난 셈이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한 것은 ‘능력의 격차’ 때문이다. 엘리트들은 일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자본이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경향이 심화한다는 불만이 쏟아지지만, 실제로는 증가한 자본 가운데 3분의 2에서 4분의 3이 엘리트의 근로소득 증가분에서 비롯된다.” “엘리트 교육, 엘리트의 근면성, 능력주의로 지탱되는 엘리트의 근로소득은 총체적으로 어마어마하다.”
그렇다면 ‘노오오오오오력’을 해서 엘리트 반열에 오르면 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에서 계층 상승은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엘리트란 자리는 ‘교육’을 통해 사실상 세습된다. “현재 부유층 어린이와 중산층 어린이의 학업 성과 격차는 중산층 어린이와 저소득층 어린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논지다. 교육이라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무너진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책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최상층에 있는 엘리트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 젊은 투자은행 간부들은 대체로 오전 6시에 출근해 자정까지도 퇴근하지 않으면서 주당 80~120시간씩 일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든, 최상층에 자리잡은 사람이든 삶의 질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능력주의 때문에 일 없이 놀게 되고 그에 따라 소득과 지위를 얻지 못하게 된 다수에게도, 능력주의의 유혹에 넘어가 치열하고 소외된 노동을 통해 인적 자본을 착취하는 소모적 경쟁에 참여한 소수에게도 이득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먼저 능력주의가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평등”을 통해 소득과 생산을 남들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래야 엘리트는 자유와 여가를 되찾고, 중산층은 소득과 지위를 높일 수 있다.
책은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한 대목을 새롭게 인용하면서 끝난다. “이제 중산층 근로자와 상위 근로자를 포괄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에게 잃을 것은 쇠사슬 이외에 없고,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 인터랙티브:난 어떤 동학개미
▶ 경향신문 바로가기
▶ 경향신문 구독신청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