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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車 마니아’ 이건희 회장의 아픈 손가락 ‘삼성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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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건희 회장의 꿈과 도전 '자동차' [사진출처=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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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큰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10일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1942년 태어난 고인(故人)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이건희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빠르고 과감한 판단과 장기적 안목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통념을 깬 역발상은 오늘날 삼성이 있게 한 원동력으로 여겨진다.

이 회장은 역발상으로 삼성은 ‘반도체 신화’를 일궈내며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섰다.

삼성그룹은 이 회장 취임 후 급성장했다. 1987년 연간 17조3900억원, 순이익 2060억원, 시가총액 1조원에 머물렀지만 50주년인 1988년 20조원을 돌파했고 2014년 말 기준 매출 200조원대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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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삼성 XM3 [사진 출처=르노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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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계의 큰별로 인정받는 이 회장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다. 자동차 사업은 ‘자동차 마니아’였던 이 회장의 꿈이자 도전이었다.

회장 취임 직후부터 자동차 사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당시 현대그룹의 매출을 넘어서려면 자동차사업을 펼쳐야 한다고 판단해서다.

이 회장은 에세이에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을 거의 다 만나봤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고 적었을 정도로 자동차 산업에 대해 애착이 깊었다.

삼성은 ‘죽어가는 부산 경제를 살리자’며 부산 신호공단을 근거지로 상용차 사업에 뛰어들었고 곧 이어 승용차 사업에도 진출했다.

1994년 김철수 상공장관은 삼성의 승용차 사업 기술도입신고서를 수리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유학 시절 자동차광이던 이 회장의 꿈이 마침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1995년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이 착공되고 이듬해 이 회장은 부산을 찾았다. 프로젝트명 KPQ(SM5) 시승회도 열렸다.

삼성자동차에 대한 애정으로 이 회장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때 평소 타던 벤츠 대신 삼성차 최고급 사양 모델인 SM5 525V를 타고 갔을 정도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는 차 한 대를 팔 때마다 150만원의 손실이 났다. 기아차 도산 사태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금융당국은 삼성에 결단을 촉구했다.

이 회장은 평생의 꿈이자 도전이었던 삼성자동차를 포기했다. 법정관리에 맡기고 이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350만주를 채권단에 증여하기로 약속했다. 근로자와 하청업체에 대한 보상안도 내놨다.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인수된 뒤 르노삼성자동차가 됐다.

르노삼성자동차에는 아직 이 회장의 손길이 담겨 있다. ‘삼성’이라는 이름은 물론 르노삼성을 상징하는 ‘태풍의 눈’ 엠블럼은 삼성자동차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이 회장의 손을 거쳤다.

르노삼성은 르노의 다른 공장에서 생산해 국내 수입하는 차량에는 르노의 로장주 엠블럼을 부착하고 있지만 부산공장에서 생산한 차량에는 태풍의 눈 엠블럼을 사용하고 있다. 르노삼성 SM6, QM6는 물론 올해 출시된 르노삼성 XM3도 태풍의 눈 엠블럼을 달았다.

[최기성 기자 gistar@mkinterne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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