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은 2014년 5월 10일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이 나타나 순천향대 서울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이송됐다. 다음 날인 11일 심혈관을 넓혀주는 스텐트 시술을 받았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6년 5개월여간 입원해 있었다. 심장 기능 등을 회복해 휠체어 운동과 재활치료를 하며 자가호흡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이 부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부터 2014년 5월 초까지 삼성을 이끌며 당시 한국 재계 1위 기업을 글로벌기업으로 키운 독특한 카리스마를 지닌 최고경영자이었다.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守城) 차원을 넘어서 제 2의 창업을 훌륭하게 이뤄냈다. 이 회장이 사령탑을 맡은 동안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각 계열사가 다른 그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성과를 일궈냈다. 대한민국 현대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이 회장 취임 후 삼성은 여러 제품에서 글로벌시장 점유율을 1등으로 끌어올렸다. D램 반도체가 처음으로 1992년 세계 1위로 등극한데 이어 S램(1995년), 대형LCD(1999년), 낸드플래시 메모리(2002년),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2005년), 평판TV(2006년), 모니터(2006년), 스마트카드IC(2006년) 등이 잇따라 글로벌 점유율 1등을 꿰찼다.
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4남 6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서울사대부고 졸업후 1965년 일본 와세다대에서 경제학 학사,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MBA)을 수료했다. 1966년 동양방송(TBC)에 이사로 입사해,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부터 1987년까지 삼성그룹 부회장을 지냈다. 1987년 이병철 선대회장의 타계로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1993년 6월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라고 변신을 촉구했다.
위기를 강조하는 유명한 어록도 많이 남겼다. 2003년 6월에는 인재경영을 강조하면서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살린다'고 말했다. 2010년 3월에도 "삼성전자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며,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제품이 사라질 것이므로 다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는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 회장은 체육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임명됐고, 1996년에는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2005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IOC 위원 자격으로 2011년 7월 한국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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