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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어쩌다 영웅’이 된 평범한 사람들 유쾌한 승리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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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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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모여 ‘토익 600점을 넘기면 고졸도 대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빛나던 주인공들은 어느새 그룹의 음험한 진실을 파헤치는 ‘영웅’이 되어간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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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고졸이라는 한계 넘어
부정의와 당당히 맞선 세 주인공
달콤한 낙관과 냉철한 현실 섞어
포기하지 않는 ‘파이팅’ 그려내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한 알 한 알 쌀을 줍고 있더라고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시나리오 초고를 처음 받던 날, 이종필 감독(40)은 이렇게 회상한다. “이 영화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하며 냉장고에서 쌀을 꺼내다가 실수로 바닥에 다 쏟아버린 거예요. 원래 저였다면 한 5분은 ‘뭐야 또’ 짜증이나 내고 있었을 텐데, 이날은 저도 모르게 쌀알을 줍게 되더군요. 그때 알았죠. 이 인물들에게는 이런 힘이 있구나. 문제가 생겼을 때 포기하거나 남 탓 하는 게 아니라, 묵묵하게 ‘파이팅’ 하는 사람들이구나.”

지난 21일 개봉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이 감독 말대로 작디작은 존재들의 성실한 분투로 빛나는 ‘파이팅’ 가득한 영화다. 1995년 ‘토익 600점 넘기면 대리 진급’이라는 꿈에 부풀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모인 입사 8년차 동기이자 고졸 말단 사원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회사 공장에서 유출된 검은 폐수를 둘러싼 음험한 진실을 ‘어쩌다’ 파헤친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진지한 야심 때문은 아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건 제 몫의 일과 윤리는 성실하게 책임지는 성정인지라, 착실하게 오지랖을 부려가며 ‘어쩌다 영웅’이 되어간다.

“초고는 사회고발물에 가까웠어요. 1990년대 한 대기업에서 실제 개설된 고졸 사원 대상 ‘토익반’과 실제 있었던 폐수 유출 사건이라는 두 축을 베이스 삼아 만든 이야기였죠.” 이 감독은 방향을 좀 더 쾌활하게 틀고 싶었다. “이 파이팅의 끝은 설령 판타지일지언정 신나고 유쾌한 승리의 서사가 되길 바랐어요.”

‘승리의 서사’로 향하는 길은 밝고 재밌어야 했다, “1990년대 글로벌 기치의 허상이나 환경오염 문제, 성차별이나 학력차별 같은 화두들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재밌게 만들지 않으면 아무도 안 봐줄 것 같았죠. 이전 영화에서 ‘반전도 없냐’는 혹평을 너무 들어서,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만들었어요. 반전에,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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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여성 주인공이 주축이다. “커리어 우먼”이라 소리쳐 보지만 여성이며 고졸이라는 이유로 허드렛일로만 내몰리는 부당한 현실 속에서도 주인공들은 출중한 지력과 용기, 감수성과 도덕성을 무기 삼아 당당히 맞서 싸운다. “영웅 서사예요. 하지만 너무 거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어쩌다 영웅’ 자영이는 실제 인물을 모델 삼아 만들었어요. 다단계에 속아 빚을 지는 바람에 파리바게뜨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어쩌다 제빵사가 된, 그러다가 결국 노조까지 만드신 분이 있어요.”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 이야기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 여성이 겪는 차별 등이 두드러지는 ‘여성 서사’ 영화다.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을 했죠. 여성 감독이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저는 영화 <친구>보다 <써니>에서 더 감흥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제가 직전 영화 <도리화가>가 망했잖아요(웃음). 물론 망한 건 제 탓이고, 토익반 친구들이 인정받지 못한 건 구조적인 문제니까 결코 대등하게 볼 순 없지만 그래도 그 처지에 이입되더라고요.”

“어쨌든 여성 서사로 받아들여질 것을 염두에 둬야 했고 신경을 많이 썼어요. 내가 여자였다면 더 잘 찍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많이 들었죠. 그때마다 물어보는 수밖에 없죠. 제작사 대표님부터 배우분들까지 여성이 많은 현장이어서 가능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장면 중 하나를 꼽아달라 했다. 보람과 시장에서 칼국수를 먹다 울던 유나, 자영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보람에게 말한다. ‘야 이자영한텐 얘기하지마.’ “이솜 배우가 제안한 장면이거든요. 저로서는 상상도 못할 대사죠. 세 인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좋은 부분들은 모두 다 배우들이 직접 만든 거예요.”

여성을 향한 성희롱과 성추행이 문제의식도 없이 횡행하던 시대다. 모니터부터 전단까지 고증 디테일을 깨알같이 살린 영화지만, 성희롱 등 ‘불편한 장면’에 대한 고증은 과감하게 ‘패스’했다. “초고에는 여성, 고졸이기에 겪는 불편한 장면들이 있었어요. 저도 관습적으로 썼는데, 찍으려고 보니까 너무 괴롭더라고요. 문득 깨달았어요. 찍기도 싫은 걸 왜 썼지. 그래서 안 찍었습니다.”

1990년대를 추억할 때 으레 나오는 “그때가 좋았지” 식의 달콤한 낙관과, “사실 그때도 답이 없었어”라는 식의 냉철한 현실 인식을 절묘하게 뒤섞은 영화다. “‘그 시절이 더 좋았다’는 지금의 향수는, 그 시절을 ‘좋게’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맞선 멋진 사람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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