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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동서남북]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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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후 30여 년 지나니 진짜와 가짜가 구별된다

과거 팔아 자리 차지하고 권력의 단물을 빨고 있다

조선일보

'노동자 시인' 박노해가 1984년 풀빛출판사에서 낸 시집 '노동의 새벽'.


1980년대 노동자 시인 박노해(63)는 군대가 오히려 사회보다 평등하다고 했다. 36년 전인 1984년 출간해 군사 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 가까이 팔린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스물일곱 살 시인은 군대 가는 스물한 살 후배에게 이런 시를 써주었다.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중략)/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도 고참이 되는 것/(중략)/ 평등하게 돌고 도는 군대 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고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을 위해 다 함께 땀 흘리는 참된 노동을 배워라.’(‘썩으러 가는 길-군대 가는 후배에게’ 일부)

박노해 시집을 필자가 처음 접한 때는 대학 신입생 때인 34년 전이었다. 머릿속 서랍에 누워있던 시가 갑작스레 튀어 오른 건 법무부 장관 아들의 소설 같은 군 생활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동자 시인이 그나마 평등하고 공평하다 여겼던 군대가 30여 년 지나 조지 오웰(1903~1950) 소설처럼 누군가에겐 ‘더 평등’하고 ‘더 공평’한 곳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인다.

박노해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7년 6개월 옥고를 치렀지만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복권됐다. 하지만 국가 보상금을 받지 않고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생명·평화·나눔’을 기치로 민간 단체를 꾸리고, 아프리카·중동·중남미 오지를 다니며 시원(始原)의 삶을 흑백 필름에 담는 사진가로 변신했다.

그도 대학생 운동권처럼 과거를 팔아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면, 눈먼 돈 쓰는 어느 의자쯤에야 쉽게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이력 팔아 자리 차지한 이 여럿이다. 후원금 받아 생활하며 자식 유학 보내고, 아들 휴가 더 쓰도록 보좌관이 부대에 전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꼬리가 밟혀 의혹이 일어도 문제없다. “적법하다” “장편소설 쓴다” 따위 말로 받아치고, 상대를 적폐 세력으로 몰면 간단히 해결된다. 검찰에도 우리 편을 곳곳에 심어 놓았으니 걱정 붙들어 매도 된다.

민주화 이후 30여 년 지난 이제야말로 옥과 석, 참과 거짓, 진짜와 가짜가 구별된다. 거짓과 가짜들은 과거를 팔아 권력을 차지하는 수법을 쓴다. 해방 후 75년 지난 지금 실체도 없는 ‘친일파’라는 허수아비를 공격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수법도 그중 하나다. 박노해 시집이 금서가 되었을 때 집권 민정당에 몸담았던 현 광복회장은 “이승만은 친일파와 결탁했다” “안익태는 민족 반역자”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전(前) 법무부 장관 아들에게 거짓 인턴 확인서 써준 의혹을 받는 청와대 비서관 출신 ‘위성 여당’ 대표는 고급 일제 자동차를 소유한 채 “친일 척결”을 외친다.

시대착오가 다른 게 아니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연좌제와 부관참시와 파묘를 하겠다 한다. 실제로는 과거 역사를 팔아 권력의 단물을 계속 빨겠다는 심산이다. 이들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까. 영화 ‘친구’의 대사는 어떨까.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조선일보

박노해 사진 에세이 '길'/느린걸음


박노해는 최근 출간한 사진 에세이 ‘길’(느린걸음)에서 “슬프게도 우리는 길을 잃어버렸다”며 “결정적 한 걸음이 없이는 다 헛된 진보다”라고 적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그가 어떤 말을 전할지 궁금했다. 박노해는 인터뷰를 사양했다. 충청도 어느 마을 작은 월세방에서 구도자(求道者)처럼 적게 먹고 시 쓰고 산책하며 산다고 출판사 대표가 근황을 전했다.

[이한수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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