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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거리의 칼럼] 짬뽕 /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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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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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 나가면 배달 오토바이, 배달 탑차들이 뿌연 어둠 속을 달려가고 있다. 24시간 영업하는 짬뽕 식당에는 밤새워 일한 사람들과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새벽밥을 먹는다. 한 구역의 거리에서 식당들은 개업과 폐업을 거듭한다.

몇달 전에 문 연 식당은 짬뽕 값을 5000원에서 4500원으로 내렸다. 자장면은 4000원이다. 옆집에서 값을 내리니까 할 수 없이 500원을 내렸다고 식당 주인은 말했다. 500원이면 계란프라이 한 개를 더 먹을 수 있으므로 500원 차이는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시장의 기능은 밑바닥에까지 정확히 작동되고 있다. 새벽 짬뽕 식당에서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거나 쇠사슬이다.

이 새벽 거리에서 노동은 신성할 수가 없다. 자아실현, 가치창조, 역사발전 같은 문명사적 가치를 모두 박탈당한 노동은 끝없는 자기착취의 반복이다. 이 거리에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노동의 윤리는 멋진 직업을 확보한 사람들의 거짓말이다.

대기업의 이윤이 많아지고 부자들이 더 잘살게 되면 그 잉여물이 아래로 떨어져서 다들 먹을 것이 많아진다는 언설은 듣기에도 모욕적이지만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빅데이터가 몰아주는 이윤이 플랫폼에 쌓여도 그 밑으로 부스러기 한 점 떨어지지 않는다. 이 거리에서 짬뽕 국물은 무한리필이다.

오랫동안 노동 위에 군림해온 강력하고 고전적인 거짓말의 체제가 코로나 재난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 이 붕괴가 어떠한 질서를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새벽 짬뽕 식당에서 인간의 근본문제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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