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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기고] 은행나무 수난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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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약 2억년을 존재해 온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생물이다. 자동차의 배기가스에도 잘 견디고, 대기를 정화하는 가로수로서 병해충에도 강해 인도와 차도 주변에 많이 심어 왔다. 은행나무는 암·수나무가 따로 있어 10월부터 암나무의 종자가 황색으로 익으면서 땅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최근 뉴스를 보면 은행나무 암나무에서 떨어진 종자가 사람들의 발길에 짓이겨져 고약한 악취를 유발하기 때문에 다른 수종으로 교체하거나, 미리 열매를 털어내 사전에 악취가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민원이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이경수 국립공원공단 차장 기술사


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화학물질을 생성해 다른 식물의 생존을 막거나 성장을 저해한다. 이를 식물의 ‘타감작용’이라고 한다. 타감작용을 통해 식물은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고, 성장을 더욱 촉진시킨다. 은행나무가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것도, 아마 타감작용을 통해 지금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기간 일시적인 악취를 유발한다는 이유로 생물을 죽이고 없애는 것이 과연 능사일까. 과거의 인류가 현재 우리처럼 생각했다면 은행나무는 지구상에서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배려가 없다면 지구의 미래는 앞으로 더욱 암담해질 것이다.

단풍이 절정이다.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한 거리 두기 정책에 따라 과거보다는 단풍을 보기 위해 멀리 산행을 가는 사람들이 줄고 있다.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설악산·내장산 등은 찾지 못하더라도 집 주변을 자주 거닌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길가를 지키던 은행나무가 베어져 그루터기만 남은 모습을 보니 올가을이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주말에 도시 근교의 은행나무 숲길이라도 찾아 걷고 싶다. 융단폭격을 맞은 듯 노란 잎들이 짙게 깔린 은행나무 숲길을. 그리고 그곳에서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되고 싶다. 인간의 이기심에 따라 스러져가는 은행나무의 고독한 운명을 느껴보면서 말이다.

이경수 국립공원공단 차장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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