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트에 내걸린 송창 작가의 신작 <분단 고찰-바라보기>. 반짝이로 뒤덮인 한국 역대 대통령 12명의 군상이 판화로 찍힌 평면 패널에 이들을 바라보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을 인쇄한 필름막이 겹쳐져 투사되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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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 뒤 판문점에서 휴전선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본 미국 대통령은 모두 5명이다. 1983년 찾아온 로널드 레이건이 시작이었다. 그 뒤 빌 클린턴(1993), 조지 부시(2002), 버락 오바마(2012)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2019)에 이르기까지 후대 대통령은 어김없이 판문점을 찾았다. 미국 대통령이 망원경으로 철조망 너머 북녘땅을 살펴본 뒤 평화의 메시지를 밝히는 것은 이제 방한의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는 미국 대통령만의 특징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물론 김일성·김정일·김정은까지 북한 최고 지도자 3명도 공통된 퍼포먼스를 벌였다.
송창 작가의 신작 <분단 고찰-바라보기>. 판문점에서 망원경을 들고 북녘을 주시하는 레이건의 모습과 남녘을 주시하는 김정은의 모습이 담긴 필름막이 엇갈리게 내걸려 있다. 벽면에는 역대 한국 대통령 12명의 초상 이미지들이 반짝이로 덮인 채 두 지도자의 시선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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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관훈동 나무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참여미술’ 작가 송창(68)씨의 개인전 ‘분단 고찰’은 이런 남북미 대통령의 판문점 퍼포먼스를 소재로 삼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이런 해묵은 퍼포먼스를 기묘한 구성으로 재현한 설치작품을 만나게 된다. 역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12명의 얼굴 사진을 실크 스크린으로 평면에 인쇄한 뒤 반짝이(스팽글)로 표현한 6개의 이미지 패널이 배경이 된다. 이 패널 위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쌍안경으로 남녘을 주시하는 대형 필름막을 겹쳐 걸었다. 옆쪽으로는 쌍안경을 든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대형 사진 필름막도 엇갈리게 배치했는데, 레이건의 시선은 맞은편의 북한 최고 지도자 3인과 한국 역대 대통령 12명의 반짝이 패널과 맞부딪힌다. 복잡하게 뒤엉킨 남북미 관계를 시선의 역학으로 표현한 셈이다.
반짝이로 덮인 자신의 신작 <분단 고찰> 앞에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송창 작가. 70여년이 지나도록 분단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배경에는 난마처럼 얽힌 남북미 지도자들의 정략적 이해관계가 있다는 나름의 분석을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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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 작가는 1980년대 이래 30여년간 비무장지대 산하를 기행하며 핍진한 분단지대의 풍경을 그려왔다. 이런 진중한 내력을 지닌 작가가 남북미 지도자들의 모습을 가벼운 반짝이로 뒤덮거나 필름에 담은 풍자적 느낌의 설치 작업으로 표현한 까닭은 무엇일까. “70년 가까이 남북미 정치 지도자들이 판문점에서 숱하게 평화와 화해를 이야기했지만, 종전 등의 실질적 조처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어요. 지난해 남북미 대화가 답보 상태에 빠진 뒤, 그 배경을 고민해보니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는 지도자들의 정략이 각기 다른 내부의 정치 사회적 구조와 얽히면서 판문점 퍼포먼스가 부박하게 이용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짝이를 내붙인 신작은 그런 분석을 표현한 겁니다.”
이번 전시는 그간 그림에 집중했던 송 작가가 전환기적인 작업 면모를 내보이는 자리로 비친다. 감성적으로 분단의 비극성을 드러내려 했던 기존 그림의 물감 안료와 붓질 대신 경박하고 냉랭한 느낌을 주는 스팽글, 보도사진, 실크스크린 등의 소재와 매체 기법들을 결합시켰다. 분단 상태가 지속되는 현실적 배경을 뜯어보고 이런 성찰을 매체 재료들의 조형적 구성으로 표출한 측면이 돋보인다. 전시를 돌아본 성완경 평론가는 “남북미 권력자들이 엇갈린 속셈을 갖고 분단 문제를 이용하는 현실 정치의 역학구도를 명쾌한 연출을 통해 하나의 감각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냈다”고 평했다. 2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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