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소녀상, 12일만에 철거 명령...그 뒤엔 日정부 집요한 로비

日정부, ‘모테기 외무상 직접 전화’부터 ‘정의연 회계부정 의혹 설명’까지 전방위로 나서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독일 수도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있다. /연합뉴스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당국의 철거 명령이 일본 정부의 집요한 로비와 물밑 외교전의 결과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光) 일본 외무상이 직접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에게 전화해 철거를 요구하는 등 끈질기게 나섰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우익 성향 산케이(産經)신문은 10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다는 점을 확인한 2015년 한·일 외교장관 합의 취지를 정중하게 설명한 것이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區)가 최근 설치된 소녀상의 설치 허가를 취소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독일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강하다는 점을 파악,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독일 정부뿐만 아니라 미테구에도 이 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입장을 반복해 설명했다. 미테구는 소녀상 허가 취소 및 철거를 명령하면서 “국가 간 역사 논쟁에서 한쪽을 돕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소녀상의 제작을 지원해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회계 부정 의혹에 대해서도 독일 측에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산케이신문은 전했다. 산케이신문은 “(정의연의) 불투명한 회계 처리 의혹 등이 불거지자 국내·외에서 엄격한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 측은 이런 경위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에 쓰인 비문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읽고 있다. /연합뉴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은 지난 2일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장관과 화상 전화 회담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모테기 외무상은 회담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베를린시에 소녀상이 놓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철거를 요청했고, 마스 외교장관은 “일본의 강한 우려를 이해한다”고 호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당시 이 같은 대화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고, 이는 일본 언론 보도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가 철거 움직임을 견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대화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산케이신문은 설명했다.

소녀상은 지난달 25일 베를린 미테구의 한 교차로에 한국계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주도로 세워졌다. 그런데 지난 7일 미테구가 갑자기 ’14일까지 소녀상을 자진 철거하지 않을 경우 강제 집행을 하고 비용을 청구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철거 명령 공문을 발송했다. 공문에는 ‘미테구가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고 일본에 반대하는 인상을 준다’ ‘일방적인 공공장소의 도구화를 거부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일본 정부 측은 이를 ‘외교 성과’로 자찬하는 분위기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9일 기자회견에서 소녀상 허가 취소에 대해 “계속 상황을 주시하겠다”며 “전향적인 움직임”이라고 평가했다. 산케이신문은 “전시(戰時)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비난하고 여성의 인권을 호소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상 설치를 계속해 온 한국 측의 수법이 국제사회에서 통하지 않게 된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의연은 11일 미테구의 평화의 소녀상 철거 명령에 항의하며 유엔특별보고관 등에 서한을 전달했다. 정의연은 서한에서 “일본 정부와 우익단체의 소녀상 철거 압력과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의 철거 공문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폄하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시민들의 합의 속에서 건립된 소녀상에 대한 일본 정부와 우익단체의 철거 요구는 베를린 시민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일이며, 미테구가 아무런 논의 없이 갑자기 철거 공문을 전달하는 것은 부당한 행정절차”라고 했다.

[이옥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