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망명 막전막후 - 한·미·북·중 치열한 정보전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작년 11월 아내와 함께 공관을 이탈해 잠적한 것으로 알려진 조성길(오른쪽에서 둘째)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대리가 앞서 작년 3월 이탈리아 베네토 주의 트레비소 인근에서 열린 한 문화 행사에 참석한 모습. 조 대사대리의 오른쪽은 이탈리아 상원의원 발렌티노 페린, 왼쪽은 파라 디 솔리고의 교구 사제인 브루노네 데 포폴 신부이./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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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한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조성길 부부는 2018년 11월 10일 로마의 공관을 빠져나와 차량을 타고 스위스로 넘어갔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조 전 대사대리는 1순위 망명지로 프랑스를 원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프랑스 망명이 무산된 직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망명 과정에 함께하지 못한 딸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는지, 다음 행선지인 동유럽 A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단순 경유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조성길 부부는 잠적 석 달 만인 작년 2월 북한 대사관이 없는 동유럽 A국 주재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다고 한다. 제3국 망명이 여의치 않자 한국행을 잠정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식통은 “조성길은 잠적 후 한 서방국가 정보기관의 보호를 받았다”며 “A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 들어올 때 해당국과 북한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그가 스스로 우리 대사관에 진입하도록 유도했다”고 전했다.
/그래픽=양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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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들의 한국행은 아내 리모씨의 돌발행동으로 위기를 맞았다. MBC 보도에 따르면, 리씨는 딸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로마의 북한 대사관에 전화를 걸면서 위치가 노출됐다. 북한은 “딸은 잘 지내고 있으니 A국 주재 중국 대사관을 통해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취지로 리씨를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리씨는 한국행을 거부하며 조 전 대사대리와 의견 충돌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하노이 미·북 2차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미·북 관계는 얼어붙었고, 북한은 ‘중개 실패’에 대한 책임을 한국에 돌리며 남북 관계도 급속 냉각됐기 때문이다. 아내 리씨가 한국행에 거부감을 보이는 가운데, 하노이 노딜의 여파로 외교적으로 민감한 상황까지 겹치며 조성길 부부의 한국행은 기약 없이 지연됐다.
하노이 노딜의 충격파가 어느 정도 잦아들 즈음인 작년 6월 30일 판문점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격 회동했다. 대북 소식통은 “거취를 놓고 갈등하던 리씨가 판문점 회동 소식을 접한 뒤 미국행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결국 한국행을 최종 결심한 조성길 부부는 작년 7월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내 리씨는 한국 정착 후에도 딸에 대한 걱정 탓에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이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15개월간 이들의 망명 소식이 공개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라고 했다. 안보 당국은 북한이 이처럼 민감한 상황을 이용해 조성길 부부의 북송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관련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귀순한 북한 외교관은 조성길 전 대사대리 외에도 십 수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한국 입국 후 북한에 남겨진 가족의 안위를 우려해 신분을 숨긴 채 조용히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 의원인 태영호 전 주영 공사처럼 일가족을 모두 데리고 망명할 경우엔 공개 활동이 가능하다.
태 의원은 조 전 대사대리의 딸이 북한에 있는 만큼 언론 보도에 신중해줬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태 의원은 전날 입장문을 통해 “(조성길 전 대사대리의) 한국 망명 보도가 각종 언론에 쏟아지고 있다”며 “북한에 친혈육과 자식을 두고 온 북한 외교관들에, 본인들의 소식 공개는 그 혈육과 자식의 운명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인도적 사안”이라고 했다.
한편 조성길 대사대리의 국내 입국 사실이 공개되면서 해수부 공무원 피살사건으로 긴장감이 높아진 남북관계에도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북한은 조성길의 한국 입국을 알고 있었더라도 공개되지 않은 점을 감안해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제는 (망명 사실이) 공개됐기 때문에 북송 요구 등 대남 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김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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