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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버려졌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것, 그것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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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제공 = Karpati&Zarewicz / ZAIKS·민음사]


작년 10월 10일 오후 1시(스웨덴 현지시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된 작가는 2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유로 발표가 순연되면서 2018·2019 수상자가 한날한시 발표됐다. 한 명은 오스트리아의 페터 한트케(78), 한 명은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58)였다.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았다"는 한트케와 달리, 토카르추크의 이름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2년생, 당시 나이 57세. '젊은 거장' 탄생의 순간이었다.

그의 대표 소설 '방랑자들'을 번역해두고 출간을 앞뒀던 민음사는 서둘러 열흘 뒤 책을 서점에 깔았다. 한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인터뷰를 청했다. 세계에서 쇄도한 인터뷰 요청 탓에 A4용지 11장짜리 24개 답변이 무려 1년 만에 도착했다. 장편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출간을 겸해서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소설가·시인인 올가 토카르추크를 28일 서면으로 만났다. 최성은 한국외대 교수가 질의응답 번역을 맡았다. 한국 언론 공동 인터뷰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니 불편해졌지만 새 의무와 새 역할도 많아졌어요. 요즘 세 작품을 동시 집필 중입니다. 여러 텍스트를 같이 작업하기를 즐겨요. 저의 내면에서 다양한 인물이 탄생하므로, 인물이 고유한 속성을 잃지 않도록 집중합니다."

신작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뜻밖에도 스릴러 추리물이다. 세계의 주변인에 불과했던 주인공 듀세이코가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인 동물을 인식하며 펼쳐지는 소설은, 인간과 동물이 조화되지 못하는 세계의 이유를 추궁한다. 영화 '흔적(POKOT)' 원작이다.

"온갖 불행이 난무한 세상을 보면서 변화하기엔 우리가 너무 나약하다는 걸 실감하기도 합니다. 세상이란 건 '이렇다'라고 단정지을 수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도 없음을 압니다. 세상이란 그저 존재할 뿐이니까요.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 책무가 막중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인간' 그 자체의 표정을 그린다. 1년간 7쇄를 찍고 3만부가 판매된 대표작 '방랑자들'이 그렇다. 불연속적인 서사 위에 세계 여러 곳의 인간을 배치하고 표정을 들여다보는데 몽타주 혹은 모자이크로 이어붙인 표정을 읽다보면 그것은 인류의 초상화가 된다.

"문학이라는 왕국은 무수히 많은 도로와 샛길로 이뤄진 거대한 영토이며, 길 없는 광야도 있습니다. 글을 쓰며 저는 쉽게 대상에 동화되고 감정을 이입합니다. 소설이란 글쓴이가 강렬하게 체험하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과정이라고 이해해요. 저 심리는 스토리텔링 욕구를 수반합니다. 언어가 실체를 입고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텍스트로 탈바꿈하며 소설이 탄생하지요."

올가 토카르추크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차 2006년 방한한 적이 있다. 카를 융과 불교 철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한국 사찰을 돌아다녔다. 자아와 타자의 경계, 시간과 공간까지 허물어지니 때로 그의 소설은 윤회를 상기한다.

"소설 '방랑자들'과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번역하신 최성은 한국외대 교수와 당시 지방 사찰을 다니기도 했는데, 당시의 체험이 '방랑자들'의 몇몇 에피소드에 영감을 주기도 했어요. 사람들의 기질, 수난의 역사 등을 보건대 한국은 조국 폴란드와 유사한 점이 상당합니다."

점점 책 읽는 행위가 소멸해가는 시대, 토카르추크는 는 글쓰기가 '창조'에 준하는 행위라고 믿는 쪽이다.

"텍스트에 지적으로 몰입하는 전통적 의미의 책 읽기 능력을 인류가 상실하리란 전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이 보급되는 곳에서 문학은 분명 독자들의 생각,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요. 문학은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믿고 싶어요."

소설가 필립 K. 딕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정의내리기도 했다. '작가는 까치와 같다'는 필립 딕의 비유를 통해서다.

"까치는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장신구나 사탕 포장지 등 온갖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내 둥지로 물고 옵니다. 버려졌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것을 발굴해 오랫동안 간직합니다. 그것이 저의 소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유태 기자]


<올가 토카르추크 한국 언론 이메일 인터뷰 전문>


* 올가 토카르추크를 한국어 오래 알려온 최성은 한국외대 교수가 인터뷰 번역을 담당했습니다.

1. 노벨상 수상 이후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인'이 되었고, 사람들이 거리에서 저를 알아보게 되어서 좀 불편해졌어요. 자유의 일부를 빼앗겼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해 오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의무와 역할이 많아졌어요. 꽤 오랫동안 작품을 쓰지 못했고요. 그 점이 상당히 괴로웠어요. 하지만 이제 조금씩 집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두 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 편의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요. 벌써 수년 전부터 써 오고 있고, 계속해서 제 곁에 있는 작품들입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뭔가 강렬하고 감동적인 대작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기대감을 느끼고는 있는데요, 제가 곧 출간을 계획하고 있는 작품은 소소하면서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저는 한 번에 여러 개의 텍스트를 작업하는 것을 즐깁니다. 그럴 때 제 안에서 다양한 인물과 다양한 성향이 탄생하거든요. 지금 저는 그 성향들이 고유한 속성을 잃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제게 있어 글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주의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2. 폴란드에서 벌써 다섯 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왔습니다. 작가님께서도 노벨 문학상을 받으실 때 중부 유럽 출신이란 사실을 강조하셨고, 또 폴란드에서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계시고요.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어떻게 느끼는지요? 또 폴란드 문학의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폴란드의 문화는 항상 '경계의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서구(西歐) 문화권과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로 형성되어 왔죠. 역사적·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폴란드 문화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모든 종류의 영향에 늘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폴란드 문학은 차별화된 독보적인 잠재력을 갖게 되었고, 여느 서구 문학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회 계층이 등장하는 고유한 문학이 만들어졌습니다. 폴란드 문학이 놀라운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저력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저는 '지역'이라는 공간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것들을 일깨워 주는 인류 체험의 보고(寶庫)라고 생각합니다. '중앙'으로부터 동떨어진, 뻔하지 않은 것들, '주류'에서 당연시하는 것들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작품을 창작할 때 저는 일상적이지 않은 것, 뭔가 다른 것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3. 2018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과 노벨 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가 됐습니다. 자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도 정말 모르겠어요! 제가 폴란드의 시골 마을에 틀어박혀 쓴 글이 서울이나 런던과 같은 세계적인 대도시의 독자들에게까지 전해진다는 건 정말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곳의 독자들도 폴란드 독자들과 똑같은 감흥을 느낄까 저는 항상 궁금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를 놀랍도록 닮아 있고, 비슷한 존재론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제가 사는 곳의 풍경이나 관습이 다른 대륙의 독자들에게 이국적으로 다가갈 때도 있겠지만, 결국 인간사의 핵심, 생의 본질은 다 같다고 봅니다.

4. 작가님께서는 꽤 이른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에 속합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부담감은 없는지요?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요?

노벨상 수상에 있어 나이가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일들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제가 여전히 젊고 건강하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얼마 전 저는 제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인류의 미래나 세상의 평등, 여성과 동물의 권익 같은, 제가 평소 고민하던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저 역시 스스로 '여성 작가'라는 사실을 알게 모르게 항상 느끼고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중요시하는 여러 사안에 일일이 관여할 시간이 부족하기에 재단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재단을 매개체로 저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우리는 서로 힘을 모으고 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5. 최근 전 세계적으로 미투 운동이 활발했고, 문학계에도 페미니즘이 대세입니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는 역사의 비극 뒤편에서 잊힐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삶을 복원하고 그 의미에 대해 질문하기도 했는데요. 여성의 삶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태고의 시간들』을 쓴 건 지금부터 이십육 년 전, 그러니까 아주 젊었을 때입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항상 궁금했어요. 우리의 삶에서 여성의 역할이 너무나도 큰데, 왜 역사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걸까. 무엇 때문에 역사는 여성들에 대해서 그처럼 쉽게 잊어버리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걸까. 역사 교과서에 주로 남성들만 등장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렇다면 여성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저는 제 작품들 속에서 여성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여성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아, 군대나 교회는 예외일 수 있겠네요.

6. 2006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관한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했던 경험은 어떠했는지, 그때 만나 본 한국 작가들과 한국 문학에 관한 인상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방문은 제게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그때의 여정이 제게는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한국 여행이었는데요, 저는 한국 음식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사는 도시, 브로츠와프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한국 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때 저는 제 번역가인 최성은 교수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한국의 곳곳을 돌아다녔고, 지방의 한 사찰에서 며칠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그때 겪은 다양한 체험이 『방랑자들』(민음사, 2019)의 몇몇 에피소드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몇몇 한국 작가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어 서신도 수차례 교환했습니다. 한국은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은 제 조국 폴란드와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거든요. 사람들의 기질, 강대국에 둘러싸인 수난의 역사, 일을 대하는 자세 등등에 있어서요.

7. 『방랑자들』에서 심리학에 대한 묘사를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전공한 심리학이 소설을 쓰시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문학과 심리학을 의미상 서로 다른 것으로 보는 관점은 오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분야들을 놓고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규정지으면서 우리는 종종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습니다. 권위 있는 문학상인 괴테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요. 심리학과 문학, 두 영역 모두 '이야기'와 '해석'에 기반하고 있고, 두 영역 모두 치유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심리학은 직접적으로, 문학은 행간을 통해 수행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또한 문학은 저의 내향성을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늘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습니다. 친구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철저히 혼자일 때 행복감을 맛보고 치유를 받습니다. 글쓰기란 자신의 고유한 내향성을 기르고 수호하게 해 주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8. 신화나 전설을 차용해 허구와 역사적 현실을 오가는 방식을 쓰시는 데에는 어떤 문학사적 영향이 있으신지요?

리얼리즘이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한 서술일 뿐, 세상이 실제로 어떤지에 관한 서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가 감히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지적 조건들과 지식, 사회적 지위 등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 있는 서술은 언제나 약간의 비이성적인 요소와 형이상학을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뇌가 방대한 분량의 정보들을 서로 결합하려면 일종의 시적(詩的)인 질서가 필요하니까요. 바로 여기에서 문학이 시작된 게 아닐까요?

9. 작가님의 문장과 챕터를 보면 미시적인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하나의 확정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단편으로 혹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연속적인 플롯이 작가님 소설의 특징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장과 챕터 나눔이 독특하게 느껴지는데, 이를 통해 의도한 효과와 이유가 있으신지요?

문학이라는 왕국은 무수히 많은 도로와 샛길로 이루어진 거대한 영토이며, 거기에는 또한 길 없는 광야도 있습니다. 저는 정신적으로 싫증을 잘 내는 유형인 데다 뭔가 이상하고, 불명확하고, 남다른 것에 끌리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저는 쉽게 대상에 동화되고 상황에 감정을 이입합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기도 하고, 글을 통해 어떤 분야의 거장이 되어 보기도 합니다. 돈을 벌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글 속에서 구현해 보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저만의 고유한 형식을 찾아 헤맸습니다. 다소 서툴고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뭔가 과감하고 색다른 형식을요. 그 결과물이 『방랑자들』입니다. 이게 과연 소설이냐, 제대로 읽힐 수 있는 텍스트냐를 놓고 편집자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껏 제가 출판한 여러 책이 제각기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겁니다. 문학이 새로운 환경에 맞춰 가며 끊임없이 변화와 변형을 거듭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백 년 전 사람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는 없으니까요.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이란 글쓴이가 강렬하게 체험하는 내면의 심리적 과정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심리적 상태는 스토리텔링의 욕구를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다 마침내 언어로 표출되고, 하나의 실체가 되고,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텍스트로 탈바꿈하는 것, 소설은 그렇게 탄생된다고 생각합니다.

10. 한 인터뷰에서는 『방랑자들』이 단순히 '이야기 모음'이 아닌 '별자리 소설'이라고 칭했습니다. 이야기의 궤도 속에서 독자들이 직접 형태와 패턴을 만들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더 부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독자들이 '방랑'에 관한 제각각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하기를 원하는지요?

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제가 겪은 체험에 가장 잘 맞는 적절한 형식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전 세계를 떠돌며 여행하고 있었는데요, 고전적인 형태의 기행문이나 르포르타주의 경우, 보다 많은 걸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와 작위성을 느꼈습니다. 좀 더 유연하면서도 특이한 형식,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장소를 새로 접하고 인지하고 기억하는 일련의 과정과 흐름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윈도우의 창을 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思考)합니다. 머릿속에서 다양한 사안들이 한꺼번에 창문을 여닫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 창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애쓰지 않습니다. 실제로 관계의 연결고리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우리의 정신은 흩어져 있는 개별적 사안들을 얼마든지 연결할 수 있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별자리 소설'을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11. 『방랑자들』을 읽다 보면 인간 육체와 기형적 신체, 또 전시되는 미라나 부검되는 시체 등에 관한 관심이 느껴집니다. 이 테마를 '방랑'이라는 주제와 연결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몸은 연약하면서도 신비한 운송 수단입니다. 우리는 그 운송 수단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인생을 유랑하는 존재이고요. 저는 우리가 자신의 몸에 관해 너무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생리학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고요, 그저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필멸의 육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 번도 제 간(肝)을 본 적이 없고, 비장(脾腸)이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모릅니다. 통증이 느껴지거나 어딘가 불편할 때, 비로소 몸 안에 있는 내장 기관의 구조를 떠올리곤 합니다. 저는 밤하늘을 보며 수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줄줄 꿸 수 있으면서도 솔방울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의식은 그 솔방울샘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우리는 밖에서 안으로, 그리고 안에서 밖으로,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되고, 우리의 내부와 외부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 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저는 『방랑자들』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1542년, 유럽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인식의 두 방향에 관해 기술한 두 권의 책이 출판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그리고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가 그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의 움직임에 대해 저술했고, 베살리우스는 최초의 인체 해부 도감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1542년이야말로 세상의 경계가 확장되고, 우리가 인식의 범위를 넓힐 수 있게 된, 새 시대의 상징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2. 『방랑자들』을 통해 여행과 인간의 이동에 대한 본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여행'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셨는데요. 신대륙 개척이나 인류사적 발견부터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 온 각국 간의 전쟁까지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동을 근간으로 합니다. 이런 이동과 여행이 인간에게 갖는 의미에 대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생각하게 된 것인지요?

인류사에서 정착 문화의 전통이 자리 잡은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의 내면 깊은 곳에는 유목민의 기질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고 봅니다. 움직임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떠올리면서 본능적으로 '움직임'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규를 위반했을 때 주어지는 형벌이 투옥, 그러니까 특정 장소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죠.

13. 동일한 장소일지라도 인지하는 주체에 따라, 또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서로에게 다르게 기억됩니다. 작가님이 세계를 여행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기억, 혹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지요? 그 경험 중 하나가 작가님의 두 소설 『방랑자들』과 『태고의 시간들』에 녹아 있는 것이겠지요?

오래전, 제 아들이 열두 살일 때 함께 말레이시아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휴가철이 한참 지난 뒤, 남중국해에 있는 한 작은 섬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날씨도 화창했고,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거기서 저는 거대하고 육중한, 그리고 무시무시한 자연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자연이 잠시 잠들어 있지만 언제라도 다른 얼굴을 드러낼 수 있고, 우리를 산산조각 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연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대한 당시의 강렬한 자각이 지금도 제 기억 속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14. 작가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는 작품이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최근작에 가장 많은 애착이 쏠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작품일 경우, 그 내용에 상당 기간 몰입하고 동화될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야고보서』를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수메르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 온 『세상의 무덤 속의 안나 인』도 제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작품입니다. 십오 년 전쯤에 쓴,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인데요, 외국어로 많이 번역되지는 못했습니다. 대놓고 제 삶을 반영하지는 않더라도 제가 쓴 모든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깊은 독자들은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므로 항상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15. 작가님께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었으면 하는지요?

언젠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 필립 딕(Philip K. Dick)의 책에서 아름다운 비유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작가는 까치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까치는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그 속에서 장신구나 사탕 포장지 등 온갖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둥지로 물고 옵니다. 저는 그의 비유가 마음에 듭니다. 왜냐하면 이따금 저도 제가 까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저는 버려졌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것,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을 발굴해서 오랫동안 간직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것들로 소설을 엮어 냅니다. 오늘날 작가들 사이에는 비관적인 사고가 팽배합니다. 새로운 미디어들이 등장하면서 문학이 위축되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죠. 또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면서 정서적으로, 또 지적(知的)으로 문학 텍스트에 몰입하는 전통적 의미의 책 읽기 능력을 인류가 점차 상실하리라고 전망하기도 합니다. 문학,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책에 관심과 열정을 갖는 사람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작가의 글이나 말보다는 정치인 혹은 경제인들의 결정이나 과학자들의 발명품, 새로 출시된 약품들을 훨씬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 것들이 세상을 시시각각 바꾸고 있으니까요. 오늘날의 문학은 일종의 엘리트 문화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출판 산업의 근간이 마련되어 있고, 출판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신문이나 서점의 기반이 있는 나라들에만 허용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특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도시의 슬럼가나 광활한 스텝에서는 문학 작품을 읽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이 보급되는 곳에서 문학은 분명 독자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16. 10월에 한국에서 작가님의 신작인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와 『낮의 집 밤의 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제 이 신작 두 권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감동적이면서도 반전이 있는 너무나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서 따 온 구절이 책의 제목이 되었는데, 이 작품을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요?

2009년 때마침 제게 반년이라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뭔가 가벼운 작품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막상 범죄 추리물의 구성을 띤, 스릴러류의 작품을 써 보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장르의 외형적 조건을 충실히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중 소설의 기본 원칙, 즉 분량이 너무 많지 않고, 난해하지 않으며, 삽화가 들어간 책을 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체코의 만화가 야로미르 슈베이지크(Jaromir Švejdik)가 삽화를 맡았는데요, 일러스트를 보자마자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슬픈 그림들이었으니까요. 소박한 의도로 시작했지만, 이 책을 쓰면서 저는 작품에 깊이 빨려 들어갔고, 한동안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등장인물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다양한 상황을 부여하면서, 이따금 저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대한 신화적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품이 본래 제 스타일에서 그리 많이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7. 이 책에서 주인공은 살상당하고 학대당하는 동물과, 인간의 탐욕과 무신경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 책의 화자인 두셰이코라는 인물의 탄생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따금 저는 세상에 온갖 불행이 난무한 것을 볼 때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바꾸기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무력하다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두셰이코와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인공 두셰이코는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상이란 건, '이렇다'라고 단정 지을 수도, 또는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세상이란 그저 존재할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에 대한 우리 인간의 책무가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18. 선생님도 채식주의자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계기가 있으신지요?

꽤 오래전부터 저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를 구분하고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고민해 왔습니다. 아마도 제가 키우는 개를 보면 누구나 제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각별한 관심과 무한한 애정, 존중의 마음으로 동물을 대해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더 이상 동물을 물건이나 몸뚱이, 혹은 신경계를 가진 기계적인 대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동물의 권한을 헌법에 명시할 때가 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동물을 독립적인 주체로 기본법에 명시함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동물의 존엄성을 법적으로 인정해 줘야 합니다. 또한 육류의 대량 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대규모 사육장을 폐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육장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악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잔혹한 행태를 끊임없이 외면하고 부정하는 동안 우리의 내면 또한 파괴되고 황폐화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19. 『방랑자들』에서 보면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 "진정한 신(神)은 동물이에요. 신은 동물 속에 있죠.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에요. 매일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죽음을 반복하고, 자신의 몸을 바쳐 우리를 먹이고, 자신의 가죽으로 우리에게 옷을 지어 입히고, 의약품 테스트를 허용해 줘요. 우리가 더 오래, 더 잘살 수 있게 하려고요. 그렇게 우리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우정과 사랑을 전하는 거죠."라며 인간의 악행을 기록한 책을 쓰고 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책 역시 그러한 책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봐도 좋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명확히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고, 살아 있는 감각을 지닌, 또 다른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요.

20. 이 책에서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을 하나 고른다면 무엇인지요?

특정한 구절 하나만 고르는 건 어렵네요. 이 작품은 범죄 스릴러이므로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후반부로 가면서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독자분들은 아마도 꽤 오랫동안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태를 경험하실 겁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를 읽으시라고 권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한국의 독자분들이 어떤 느낌을 받을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21. 『낮의 집 밤의 집』에 관해 질문 드립니다. 소설이 사실적이면서 허구적이고 허구적인 듯하면서 사실적인 인상이 강하게 듭니다.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작가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지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 특정한 공간 속에 아로새겨진 개인의 경험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 그러한 경험들을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실적인 방식으로만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경험들은 훨씬 폭넓고 방대해서 그 안에는 언어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불확실하고 이성적인 부분들, 나아가 신비주의에 가까운 요소들도 내포되어 있으니까요. 바로 그런 영역을 탐험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요?

22. 쿰메르니스의 생애와 파스칼리스 수도사의 에피소드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이야기들과 결이 다른 부분이 많은데 어떻게 쓰게 되었으며,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지요?

저희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성지 순례자들을 위한 '순례자의 집'이 있는데요, 거기서 저는 얼굴에 수염이 까뭇까뭇 돋아난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한 여인의 괴상한 조각상을 발견했습니다. 대체 이 조각상이 무엇일까, 어디서 유래했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성녀 쿰메르니스의 전설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요소는 성별의 구분이 불명확하고 유동적이라는 점인데요, 저는 이것이 상당히 현대적인 모티브라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성(性)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바이젠더'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런 식의 기술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합니다.

23.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 마르타는 어떤 사람인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마르타는 <낮의 집 밤의 집>의 혼(魂)이나 다름없습니다. 작품의 구상 단계에서부터 이미 '마르타'라는 인물이 제 머릿속에 떠올랐고, 작품을 쓰는 내내 제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끔은 마르타가 제 귀에 대고 이 모든 이야기를 속삭여 주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24. 작가님의 글을 사랑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저는 정말 행복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낮의 집, 밤의 집』 그리고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이 두 권의 신간을 꼭 읽어 보시라고 여러분께 진심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이미 제가 쓴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보신 독자분들이라면 이 두 권의 책에서 뭔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벌써 수년 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의 방문이 지금까지 내내 제 기억 속에 아름답게 간직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계기가 마련되어 여러분께 갈 수 있기를, 그래서 한국의 독자분들을 직접 만나 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께 진심을 담아 안부 인사를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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