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화가 37인 다룬 '살아남은 그림들' 출간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지난 100년 한국 역사는 격동의 시대라는 말로 모자랄 만큼 파란만장했다. 식민지배와 해방,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투쟁, 급속한 산업화까지 모든 일을 불과 한 세기 만에 겪었다.
격변기 갖은 역경 속에서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화가들이 있다.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남긴 작품은 오늘날 우리 곁에 보석처럼 빛나는 한국 근현대미술 명작이 됐다.
신간 '살아남은 그림들'은 그런 시간을 거친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한 책이다.
'국민 화가' 반열에 오른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를 비롯해 오지호, 변관식, 김창열, 이우환, 이승조, 구본웅, 장욱진, 유영국 등 뚜렷한 족적을 남긴 미술가 37인이 주인공이다.
10여년간 일간지 미술·문화재 전문기자로 일해온 조상인 기자가 주요 작가와 작품을 세심하게 살펴본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미술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오랜 시간 현장에서 취재한 경험을 살려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직접 화가와 유족, 연구자를 만나 얻은 자료 등을 바탕으로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쉬운 말로 들려준다.
저자는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던 시절, 화가로 살아남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끝내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그려, 온갖 풍파를 겪고도 오늘날까지 전하는 명작들을 부를 말이 '살아남은 그림들' 말고는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고 제목을 설명했다.
책은 치열하게 살았던 화가들 한명 한명을 작가별로 소개해 그들의 극적인 삶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삶과 그림에 얽힌 사연과 저자의 감상이 작품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는다.
누구 하나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이가 없다. 어떤 아픔도 예술로 승화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었지만 개인사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생이별한 최영림은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나서야 그간 간직한 감정을 실어 한국전쟁의 비극을 그렸다.
피폐하던 시절 이중섭은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꿈같은 나날을 그렸고,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이응노는 교도소에서 간장으로 그림을 그리고 밥알로 조각을 빚었다.
살아남은 작품들의 사연도 다채롭다. 영원히 사라졌거나, 사라지거나 잊힐뻔한 위기를 겨우 넘긴 그림도 많다.
집에 불이 나고, 사후에는 전쟁 중에 그림이 있던 오빠 집을 북한군이 점령해 나혜석의 남은 그림은 50여점에 불과하다.
최초 유럽 유학파 화가인 배운성은 월북 후 한국에서 잊히고 작품도 남지 않았으나, 프랑스 파리에서 우연히 그림이 발견되면서 재조명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과 다른 책 속 내용도 눈길을 끈다. 저자는 초봄 풍경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오지호의 '남향집'이 실제로는 초겨울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밝혔다. 1946년 개인전 당시 화가가 직접 쓴 작품 해설을 확인한 결과다.
의견이 분분한 배운성 '가족도'의 등장인물을 두고는 작가의 어머니와 동생 등도 그려져 있다고 추론했다.
책에는 약 150점의 작품이 실려있다. 직접 보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국공립미술관 소장품 중심으로 고른 배려도 돋보인다.
눌와. 404쪽. 2만1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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