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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내가 n번방 고객? 교수가 디지털교도소 증거조작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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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거래 당시 대화 캡처 화면

폰 기종 다르고 포토샵 흔적까지

“다른 피해자는 죽음 생각했을 것

난 정신과 의사라 버틸 수 있었다”

중앙일보

채정호 가톨릭대 의대 교수


평범한 일상이 지옥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지난 6월 29일 월요일 아침, 저명 정신의학과 전문의인 채정호(59) 가톨릭대 의대 교수의 휴대전화로 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방송국 카메라도 채 교수가 근무하는 병원 앞에 진을 쳤다. 기자들은 똑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채 교수님, 디지털교도소에 신상이 공개되셨어요. 성착취 영상 구매하려 하신 것이 맞나요?”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채 교수는 “네? 그런 사실 없습니다”라고 서둘러 전화를 끊은 뒤 인터넷을 찾아봤다. 그가 처음 ‘디지털교도소’를 접한 순간이었다. 디지털교도소는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 ‘n번방’ 사건 이후인 지난 3월 일종의 ‘자경단(自警團)’을 자처하며 만들어진 사이트다. 성범죄자 추정 인물들의 신상을 공개하는 디지털교도소엔 채 교수의 신상과 휴대전화 번호, 그처럼 보이는 인물이 성착취 동영상을 구매하려고 시도한 텔레그램 대화 캡처 화면이 사흘 전부터 게시돼 있었다. 이후 채 교수의 휴대전화엔 각종 욕설이 담긴 카톡과 메시지가 쏟아졌다. “니 교수 맞냐?” “죽을 준비 해” “하나님은 너같은 ××를 자녀로 둔 적 없다. 탈기독교 해” 같은 거였다. 새벽마다 모르는 번호로 휴대전화가 울려댔다. 많을 땐 수백 건에 달했다.

이런 상황은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 그가 장로로 있는 교회 목사와 신자들에게도 알려졌다. 억울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 지인이 있자 채 교수는 경찰 수사를 택했다. 불명의 디지털교도소 운영자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경찰은 지난 7월 말부터 2주간 포렌식에 나서 메시지 9만9962건, 브라우저 기록 5만3979건, 멀티미디어 사용 내역 8720건을 샅샅이 들여다봤다.

중앙일보

1, 2 채정호 교수와 그의 변호인단이 밝혀낸 디지털교도소 텔레그램 대화 허위사실 증거 중 일부. 3 디지털교도소를 수사하는 대구지방경찰청이 보낸 공문 캡처. [사진 채정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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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교도소 수사를 전담하고 있는 대구지방경찰청은 8월 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윤리위원장에게 ‘고소인 채정호 고소사건에 대한 의견 회신’ 공문을 보냈다. 채 교수의 휴대전화에는 디지털교도소에 게재된 것과 같은 ‘텔레그램 대화’나 성착취물을 구매하려는 것으로 의심할 만한 대화·사진·영상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호인과 지인의 도움을 받아 문제의 텔레그램 대화의 ‘포토샵 흔적’도 확인했다. 채 교수는 안드로이드폰을 사용하는데, 해당 텔레그램 대화가 아이폰을 통해 이뤄진 증거도 발견했다. 경찰은 현재 해외에 거주 중으로 알려진 디지털교도소 운영자를 추적하고 있다.

채 교수는 8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실제 교도소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두 달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6월엔 이미 조주빈의 n번방이 사회의 중심 이슈로 떠올랐던 시점인데 제가 왜 신분을 공개하며 성착취 영상을 구매하려 했겠느냐”고 반문한 뒤 “저는 자살을 막는 정신과 의사라 버텼지만 다른 피해자라면 죽음까지 생각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수사 과정에서 “인격적 살인을 당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가 심각한 사회현상이란 것엔 공감하지만 사법 체계를 무시한 사적 복수는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디지털교도소 사이트가 8일 오후부터 접속이 안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403 Forbidden’이라는 오류 메시지가 뜬다. 디지털교도소 운영진이 사이트를 폐쇄했는지, 다른 이유로 차단된 것인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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