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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조용헌 살롱] [1253] 황매산 백련재(百鍊齋) 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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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조용헌


‘먹고살기는 힘들고, 세상은 칼춤 추는 것처럼 살벌하고, 인생의 좋은 시절은 다 가버렸구나!’ 이런 비관적 생각이 들 때마다 등산 스틱과 배낭을 챙겨서 산에 간다. 산의 짙푸른 녹음이 나를 달래준다. 계곡의 물소리, 새소리가 근심을 씻어준다. 여기저기 이름 모를 산꽃들에서 풍기는 향기가 찌푸린 인상을 펴게 해준다. 가끔 가는 산 가운데 황매산(黃梅山·1108m)이 있다. 합천군과 산청군 경계에 있는 산이다. 황매산 자락에는 아는 분의 집이 있다. 문화원장을 지내고 퇴직한 임영주(67) 선생 집인데, 합천군 가회면 산골의 이 근방 경치가 어렸을 때 보았던 우리나라 산골 동네의 소박하고 푸근한 정취를 보존하고 있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장면은 뒷산인 모산재의 바위 암벽들이다. 황매산 자락인 모산재(767m)는 강건한 기상을 지니고 있다. 골기(骨氣)가 충만하다. “인생 잠깐 살다가 죽는 것인데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말거라. 나는 백만 년을 이렇게 버티고 있다”고 모산재는 메시지를 전한다. 황매산은 평평한 토체의 산이고, 여기에서 뻗어나온 바위산 모산재는 토생금(土生金)의 이치를 말해준다. 풍광이 좋은 지역에는 인간의 스토리도 있기 마련이다. 임 선생이 모산재 주변 옛날 선비들이 공부했던 유적지로 데리고 간다. 19세기에 경남 지역 유학을 부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1824~1894)이 중년에 황매산 자락에 들어와 공부했던 곳이다. 나라는 망해가고, 비전은 없고, 먹고살기는 힘들었던 시절에 이 산골짜기 숲속 바위 언덕에서 백련재(百鍊齋)라는 서당을 운영했다. 바위 봉우리 모습이 누룩을 쌓아놓은 모습과 흡사하다고 하여 ‘누룩덤’이라는 이름이 붙은 암벽 밑에 자리 잡은 서당이다. 서당터치고는 센 터이다. 원래 백련암(白蓮庵)이라는 절터였다. 구전에 따르면 정조 때 명재상 번암 채제공이 유년 시절에 이 백련암 터에 머무르던 봉암 대사 밑에서 글을 배웠던 곳이라고 한다. 이 백련재에서 인조반정과 무신란 이후로 주눅이 들어 눌려 있었던 경상 우도의 유학이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이 백련재에서 공부했던 학인들이 이후로 산청군 신등면의 이택당(麗澤堂)으로 옮겨가면서 우도의 학자들이 집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학단의 흐름이 마지막 유학자 중재(重齋) 김황(金榥·1896~1978)의 도양서원까지 연결된다. 아무 비전도 없던 난세에 포기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했던 선비들의 유적지이다.

[조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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