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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마스크가 만든 풍경들[카버의 한국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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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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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야! 너 너무한 거 아니냐?”

며칠 전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한참 머리를 쥐어짰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손에 땀을 쥔 채 조심스럽게 답장을 보냈다. 심장이 거칠게 뛰는 가운데 친구가 보낼 신랄한 ‘규탄’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별일 아니었다. 그저 길을 가다가 친구를 마주쳤다는데 내가 그의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쳤다는 것이었다.

사실 최근 한두 번이 아니라 자주 생기는 일이었다. “판사님. 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근거로 무죄를 주장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친구의 속상한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정말로 결백하다. 이 모든 일이 전부 마스크 탓이다. 마치 가면을 쓴 슈퍼히어로의 정체를 아무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나도 요즘 코로나19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면인식불능증에 걸린 것처럼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인사하는 순간 나도 절로 고개를 숙였지만 사실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 몇 번 있었으니 불안하기만 하다.

마스크 때문에 알아보지 못해 지인과 불화를 초래하는 것뿐 아니라 상대방을 무척 답답하게 했던 상황도 있었다. 내가 한국말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마스크를 쓴 채 대화를 하다 보니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마스크를 쓰면 목소리 크기도 줄어들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다시 말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하게 된다. 요즘 회의 대부분은 마스크를 착용해 의사소통이 어려워 일하는 데도 어려움이 크다.

그래도 마스크는 시행하기 쉬운 데다, 가장 강력한 방역 수칙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항의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는 일도 드물다. 영국이나 미국과는 너무나 다르다. 영국인 여러 명의 무모한 행동을 보고 나조차 너무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모순된 정부 정책 때문에 생긴 국민의 불안, 자가 격리 수칙을 어기는 정치 지도자들, 재미로 문손잡이를 핥는 사람들…. 다양한 해외 사건을 뉴스에서 볼 때마다 너무 황당해 어쩔 줄 모를 지경이다. 전 세계적인 유행병이 번진 시기에 한국에 있는 것이 다행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자가 격리를 어기는 사람도 있고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며 버스 기사와 다투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상당히 적을뿐더러 발생할 때마다 법적 조치를 하고 있으니 안심이 된다. 나도 마스크의 효율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쓰기가 싫다. 마스크가 필수품이 된 코로나19 시대에 마스크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있다면 아마 평상시에도 외출할 때면 마스크를 반드시 써야 하는 연예인들일 것이다. 수은주가 30도 이상으로 올라가는 7, 8월 무더위에는 그런 연예인들도 불편하겠지만 질병이라는 재앙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참고 버틸 수밖에 없다.

하나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우수한 코로나19 방역 대책을 보여줬지만 하나 빠진 것이 있다.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 마스크 쓰는 것, 재채기로 나오는 비말을 팔꿈치로 막는 것, 악수를 피하는 것, 손을 자주 씻는 것 등 다 분명한 효과를 봤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홍보 포스터에 왜 침을 뱉지 말라는 내용은 없을까. 비말 감염이 위험하다는 경고에도 ‘침을 뱉지 말라’는 경고가 없는 건 분명 문제다. 사실 그런 권고가 없어도 모두 자발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에 침을 뱉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대구에서 일어난 확산 사태가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웠지만 요즘 우리가 다른 나라를 보며 너무 안일하게 생활하고 있지 않나 싶어 걱정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격언이 있다. 이 시기에 액면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되는 격언이긴 하지만 격언이 담고 있는 은유적 가치를 되새겨 보자.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끝까지 뭉쳐 건강하고 안전한 삶으로 다시 돌아가자.

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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